미 육군 참모총장 재직 시절의 맥아더(오른쪽 두번째). 그는 탄약 보급 문제 등의 이유를 들며 T1 도입을 반대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소총 개발을 막은 장애 요인이 되긴 했지만, 제2차세계대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맥아더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말하기 어렵다.<사진 : 조선일보 DB>
미 육군 참모총장 재직 시절의 맥아더(오른쪽 두번째). 그는 탄약 보급 문제 등의 이유를 들며 T1 도입을 반대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소총 개발을 막은 장애 요인이 되긴 했지만, 제2차세계대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맥아더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말하기 어렵다.<사진 : 조선일보 DB>

군(軍)은 크게 사람과 무기의 조합으로 이뤄진다.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다양한 무기를 보유하는데, 그중 개별 병사들이 보유하는 소총은 가장 기본이 되는 무기다. 결론적으로 소총은 개별 병사가 단독으로 쉽게 휴대하고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와 무게가 제한된다. 그런데 총탄을 발사해 목표물을 타격하는 종류의 무기는 일단 크고 무거워야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소총은 군이 사용하는 무기 중 가장 위력이 약한 무기라고 보면 된다. 이처럼 크기와 용도가 제한되다 보니 현대식 소총의 기본적 메커니즘과 스펙은 1841년 드라이제소총(후장식 강선소총)이 탄생한 후 지금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소총의 기능보다 군 운영 중시한 맥아더

하지만 개념과 외형은 비슷해도 1980년대 PC와 최신 PC의 능력 차이가 분명한 것처럼 당연히 소총의 성능은 꾸준히 향상돼 왔다. 그중 가장 커다란 변화라면 제2차세계대전 말을 기점으로 노리쇠를 일일이 작동시켜 한발씩 사격하는 ‘볼트액션소총’에서 연사가 가능한 ‘자동소총’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단순한 차이 같지만 군의 주력 소총이 단발에서 연사로 바뀌는 데 거의 100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기관총이 등장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총을 연사하는 기술은 이미 오래전에 확보돼 있었다. 문제는 연사 시 발생하는 반동이 사거리와 정확도에 영향을 끼치는 점이었다. 반동을 잡으려고 초기 기관총 무게가 30㎏을 넘었을 정도였으니 들고 다니는 소총을 자동화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1914년 발발한 제1차세계대전이 방어자에게 유리한 참호전으로 일관하자 이때부터 공격자가 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는 자동소총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M1918 BAR 같은 초창기 자동소총이 등장했지만 현대 분대지원용 기관총보다 무거운 10㎏에 가까웠다. 반동을 잡으려고 권총탄을 사용하는 기관단총도 등장했지만 유효사거리가 불과 100m 이내였고 저지력과 정확도는 포기하다시피 했다.

결국 품질 좋은 자동소총의 개발은 종전 이후로 미뤄졌다. 1925년, 미군은 기존 제식 소총인 M1903 대체 사업을 실시했다. 이때 자동소총을 염두에 뒀지만 여전한 기술적 난제와 비용 문제 때문에 노리쇠 작동 없이 방아쇠만으로 사격이 가능한 반자동소총으로 개발 방향을 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동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았다.

1928년, 기존 7.62×63㎜탄을 대폭 축소한 7×51㎜탄을 사용해 반동을 잡은 T1이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됐다. 테스트 결과 위력이나 사거리에서 크게 문제가 없음이 확인돼 관계자들을 흡족하게 만들었으나 당시 육군 참모총장 맥아더가 도입을 거부했다. 엄청나게 재고가 많은 기존 탄 대신에 별도의 탄을 사용하는 것이 보급 체계에 문제가 많다는 이유였다.

군의 운영을 거시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제식무기나 보급품을 단순하게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맥아더의 생각은 충분히 타당했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었다. 하지만 30여년 후에는 오히려 변화를 막는 커다란 장애가 됐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1933년 기존 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한 T3가 정식 소총으로 채택돼 1936년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너무나 유명한 M1 개런드 소총(이하 M1)이다. 독일의 Kar98, 소련의 모신나강, 영국의 리엔필드처럼 당시 주력 소총은 분당 10발 내외를 발사할 수 있었지만 M1은 60발 정도 사격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의 SVT-40, 독일의 G43처럼 여타 반자동소총도 있었지만 성능 면에서 M1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한마디로 승전의 공신 중 하나였다.

하지만 M1은 탄생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 커다란 도전을 받았다. 전쟁 말기에 총의 역사를 새롭게 쓴 독일의 StG44가 등장한 것이었다. StG44는 불발로 끝난 T1처럼 보다 작은 규격의 탄환을 사용해 반동을 줄였지만 화력과 연사력은 뛰어났다. 이런 종류의 소총을 별도로 돌격소총이라 칭하는데, 전후 너무나도 유명한 AK-47과 M16의 탄생에 영향을 줬다.

냉전 시대가 개막하면서 소련이 지금까지도 최고의 소총으로 평가받는 AK-47을 내놓자 미국도 더 이상 M1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처럼 전혀 새로운 개념의 돌격소총을 만들려하지 않고, M1에 대한 신뢰가 너무 크다보니 이를 자동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렇게 해서 1959년 M14 자동소총이 탄생했다. 하지만 월남전에서 곧바로 문제가 드러났다. 기본적으로 M1을 자동화한 것이다 보니 연사 시 반동이 심했고 오히려 무게와 크기가 늘어나 휴대가 불편했다. 결국 1964년 5.56×45㎜탄을 사용하는 M16이 대항마로 결정되면서 M14는 5년 만에 2선으로 물러났다.

M1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소총이었으나 총탄 문제로 자동소총으로 진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M1으로 행사 중인 미 해병 의장대.
M1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소총이었으나 총탄 문제로 자동소총으로
진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M1으로 행사 중인 미 해병 의장대.


제2차 세계대전 후‘M1’소총 한계 드러나

결과론이지만 만일 30여년 전 맥아더가 T1의 개발을 승인했다면 M14는 지금도 주력으로 사용되는 성공적인 자동소총으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1949년 실전 배치된 AK-47이 여전히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소총이고, 현재 미군의 M4 카빈이 M16을 개량한 소총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아주 잘 만든 총은 오랫동안 사용될 수 있다. 비록 맥아더에 의해 좌절됐지만 T1은 그런 역사를 시작할 만한 자격이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M1은 탄생 10년 후에 있었던 제2차세계대전에서는 최고의 소총이었다. 1977년 “모든 사람들이 집집마다 컴퓨터를 들여 놓을 이유는 없다”고 이야기했던 이가 당대 IT 분야를 선도하던 디지털이큅먼트(DEC)의 창업자 켄 올슨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아무리 전문가라도 30년 후까지 정확히 예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시 맥아더의 결정이 선견지명이 없었다고 비판하기도 어렵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한국자동차보험 근무, 무역 대행업체인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로 활동, 주요 저서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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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 개런드 소총 세계 최초로 보병 부대에 널리 보급된 반자동소총이다. 1936년 M1 개런드는 M1903 스프링필드를 대체하는 표준 제식 소총으로 미군에 공식 채택됐다. 이후 1957년 미국은 M1 개런드를 M14 소총으로 대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