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장수기업의 리더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밥 드 카이퍼 ‘드 카이퍼’ 전 대표, 구로카와 미쓰히로(黑川光博) ‘도라야’ 대표, 마이클 빌라드 ‘VMC’ 대표(사진 가운데), 피나 아마렐리 ‘아마렐리’ 대표, 정 가운데는 오쿠라 하루히코(大倉治彦) ‘겟케이칸’ 대표.
세계 장수기업의 리더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밥 드 카이퍼 ‘드 카이퍼’ 전 대표, 구로카와 미쓰히로(黑川光博) ‘도라야’ 대표, 마이클 빌라드 ‘VMC’ 대표(사진 가운데), 피나 아마렐리 ‘아마렐리’ 대표, 정 가운데는 오쿠라 하루히코(大倉治彦) ‘겟케이칸’ 대표.

프랑스 파리에는 세계 장수기업 모임인 에노키안협회(The Henokiens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icentenary Family Companies)가 있다. 에노키안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에녹’이 365년이나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협회의 회원사가 되려면 창업한 지 200년 이상이면서 창업자 자손이 현재 경영자이거나 임원이어야 한다. 회사의 대주주 역시 오너 가족이면서 건전하고 사회적 존경을 받는 경영을 해야 한다. 가입 조건이 엄격한 탓에 회원사는 47곳 정도다.

회원사에는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 기업이 많은데, 일본 기업 8곳도 포함돼 있다. 기업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유럽의 와인 제조, 유리 가공, 포장, 지도 제작, 선박 건조 기업들과 일본 호시료칸, 일본 제과전문점 도라야 등으로 다양하다. 음료, 식품기업들이 많고 그 외에는 생활필수품 제조회사들이 자리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영학계는 세계 각국 장수기업들의 성장비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선도기업들이 전 세계에 닥친 경제위기로 흔들리는 사이 200년 이상 된 장수기업들은 어떻게 시대를 견디며 성장했을까.

올해 프랑스 파리 남동쪽 퐁텐블로에 위치한 인시아드의 유럽 캠퍼스에서 가족기업의 날에 에노키안 가족들은 어떻게 그들이 거대한 변화의 시대를 거치면서 회사를 이끌어 왔는지에 대한 인사이트를 나눴다. 에노키안협회 회원사의 장수 비결과 함께 세계 장수기업들의 노하우를 분석해봤다.


내밀한 경영 노하우, 다음 세대로 전달

많은 학자들이 가족기업의 장수비결을 연구한 결과, 이 기업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창업할 당시 팔기 시작한 오리지널 상품을 여전히 판매하고 있으며 그 품질에는 변함이 없었다. 발전을 통해 보다 업그레이드된 경우도 많았다. 특히 장기적인 리더십으로 의사결정 과정이 매우 신속하게 이뤄지고 있어,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지속적인 경영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경영권이 계승되기 때문에 기업의 내밀한 경영 노하우가 고스란히 다음 세대 리더에게 전해진다는 장점도 있었다.

세대를 초월한 기업의 또 다른 특징은 ‘변화 의지’다. 보통 오래된 가족기업을 떠올리면, 전통을 굳게 지키며 자신들의 사업방식과 가치관을 고수하는 기업 이미지가 떠오른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운영방식을 견고하게 지키고 유지하지만, 에노키안처럼 세기를 뛰어넘은 가족기업은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완전히 변화해왔다.

오래 지속되는, 뛰어난 가족기업은 현대성을 유지하고 승계문제, 정치·경제 환경 변화, 각종 규제들로부터 오는 주요 장애물들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을 채택함으로써 살아남았다.

총기, 스포츠 의류, 가방, 액세서리 등을 판매하는 ‘베레타’ 런던 갤러리. <사진 : 베레타>
총기, 스포츠 의류, 가방, 액세서리 등을 판매하는 ‘베레타’ 런던 갤러리. <사진 : 베레타>


성공비결 1 |
주력 제품 업그레이드해 신규 고객 창출

화과자 전문점인 일본 도라야(虎屋)는 1600년에 설립됐다. 도라야는 아주 오랫동안 고객들을 확보하는 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쌀과 팥 페이스트로 만든 화과자(和菓子)는 설립 당시부터 가게를 찾은 소비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라야는 국내 수요에만 안주하지 않고 세계시장을 바라봤다. 도라야를 설립한 구로카와(黑川) 가문은 화과자 판매망을 전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16대 사장인 구로카와 미쓰토모(黑川光朝)는 1980년 파리에서 화과자와 함께 차를 파는 찻집을 열었지만, 화과자가 낯선 유럽인들이 가게로 들어오게끔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구로카와 일가는 화과자를 유럽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시키는 실험을 반복했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초콜릿·과일·전통 재료의 적절한 혼합 비율을 찾아냈다. 유럽인들이 가게로 몰려들기까지 15년이 걸렸다.

네덜란드의 증류주 생산회사인 드 카이퍼(De Kuyper) 역시 시대 흐름에 맞춰 회사의 판매 전략을 변경했다. 드 카이퍼는 전통적으로 제네바 진과 같은 현지 제품을 주력으로 판매해왔지만, 알코올 도수가 낮은 칵테일을 즐기는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퍼짐에 따라 젊은 세대 칵테일 애호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국제적인 제품을 개발했다. 시대에 맞춰 제품 라인을 변경한 것이다.

1662년 무역회사로 출발한 네덜란드 기업 반 에그헨(Van Eeghen)도 신규 고객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19세기부터 식품 보충제 사업에 눈을 뜬 반 에그헨은 세계 고령인구 증가에 따라 건강기능식품 시장으로 눈을 돌려 관련 제품 개발에 나서고 있다.


성공비결 2 |
승계 과정 객관성 높여 경영권 분쟁 최소화

증류주 제조사인 드 카이퍼는 1695년에 설립됐다. 이 회사가 320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은 좋은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최근 이 회사에서는 가족이 아닌 멤버로 구성된 비상임 감독위원회가 다음 경영권 승계자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리더십 결정 과정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경영권이 승계되는 고전적 모델에서 벗어나보자는 움직임과 함께 시작됐다.

가장 적합한 후보자를 결정하기 위해 일련의 명확한 규칙들이 적용됐다. 후보자는 가족 구성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가족회사가 아닌 타 회사에서 5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일정 수준의 교육을 이수해야 하고 가족회사에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밥 드 카이퍼(Bob de Kuyper) 전 CEO는 “이런 객관적인 과정을 통해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 중 다음 승계자를 선택하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드 카이퍼는 승계 과정의 객관성을 높여 족벌경영, 부적합한 가족의 경영참여, 오너에 집중된 의사결정 구조 등 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장애물들을 극복했다.

에노키안협회의 회원사는 아니지만 일본의 장수 가족기업들도 장자상속이 아닌 적자(適者)상속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578년에 설립된 일본 오사카의 건설사 곤고구미(金剛組)는 가족 승계를 고집하지 않고 가장 유능한 후보자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과거 위기에 빠진 회사를 뛰어난 여성 CEO가 일으켜 세우기도 했고, 2006년 회사가 파산 위기를 맞았을 때는 1428년간 회사를 이끌어 온 곤고 가문이 물러나고 영업양도 방식으로 비가족 구성원이 회사를 존속시켰다.

1625년에 설립된 주류업체 후쿠미쓰야(福光屋)는 형제 중 적임자 한 사람에게 사업을 승계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회사를 떠나도록 해 경영권 분쟁을 미연에 차단하고 있다.


성공비결 3 |
설립 초기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

드 카이퍼의 증류주. <사진 : 드 카이퍼>
드 카이퍼의 증류주. <사진 : 드 카이퍼>

VMC(Viellard Migeon&Cie)는 철강 변형으로 기계 작동부를 제조하는 회사로 1796년에 설립됐다. VMC의 장수 비결은 회사 인력에 투자하고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발전한 것이다. 동부 프랑스에 위치한 VMC는 오랫동안 지역생산을 유지해왔고, 직원과 지역 사람들의 친밀감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VMC의 45개 공장 중 절반이 프랑스에 있다. 과거에는 영국 제조지역에 거주하던 가족들을 프랑스로 이주시켜, 해당 지방 사람들에게 전문지식을 전파하기도 했다. 지역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작은 경제권을 형성한 것이다.

VMC의 전무 이사인 엠마누엘 빌라드(Emmanuel Viellard)는 “회사, 공장에 대한 가족, 직원들의 친밀감은 회사의 성공과 존속을 가능하게 했다”며 “회사 경영진은 친밀감을 기반으로 더욱 명확하고 빠른 의사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성공비결 4 |
적극적인 전략적 인수·합병 진행

이후 VMC는 인수·합병을 통해 어마어마한 확장을 거듭했다. 철선(강선)을 기반으로 한 부가가치 제품을 제조해 수익을 올려온 회사는 새로운 시장 발굴을 위해 핀란드 회사 라팔라(Rapala)를 인수했다. 라팔라는 특수 낚시 후크 부문의 글로벌 리더로, 야금(冶金) 분야에서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는 VMC가 이를 인수해 새로운 제품 라인을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VMC는 13%의 소주주였지만 각 PE(private equity) 오너십이 끝남에 따라 단계적으로 주요 PE 투자자들의 주식을 사들이는 전략을 활용했다.

결과적으로 현재 VMC-라팔라 지분은 45%를 가족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회사의 장기 비전을 컨트롤하고 전략을 변경할 수 있게 됐다. 현재 VMC는 45개국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활동하며, 특수 낚시 후크 제조의 세계시장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인수·합병을 통해 항공우주·의료·자동차·화장품 분야로도 진출 중이다.

파브리카 다르미 피에트로 베레타(Fabbrica D’armi Pietro Beretta)는 베니스 공화국에 185개의 총기를 공급했던 바르톨로메오 베레타(Bartolomeo Beretta)가 1526년에 설립한 기업이다. 현재는 베레타 가문의 15대 손이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사이즈와 형태의 군용·경찰용 무기를 생산하고 있는 베레타는 제품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기 위해 기술기업 인수에 적극 나섰다. 2002년에는 전기광학 기술력을 높이기 위해 관련 회사를 인수했고, 2008년에는 최초의 포켓 사이즈 쌍안경 제조업체인 스타이너(Steiner)를 인수했다. 최근에는 야간 시력(night-vision) 고글에도 투자하며, 성장동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일본 화과자 전문점 ‘도라야’의 파리 지점. <사진 : 도라야>
일본 화과자 전문점 ‘도라야’의 파리 지점. <사진 : 도라야>


끊임없는 혁신으로 살아남아

1637년에 설립된 일본의 주류회사 겟케이칸(月桂冠)의 오쿠라 하루히코(大倉治彦) 대표는 “우리가 380년간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으로 혁신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통을 지키겠다고 한 가지만 고집할 게 아니라 끊임없이 혁신해야만 회사의 오랜 전통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피나 아마렐리(Pina Amarelli) 에노키안협회장은 “윤리경영과 창업 초기부터 전수된 회사의 가치를 지켜온 것에 회사의 장수비결이 있다”고 했다. 회원사들 역시 기업의 핵심 가치를 지켜온 것이 자신들의 장수비결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들이 말하는 핵심 가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가족의 화합이다. 경영권 승계가 가족기업의 리스크로 꼽히는 만큼 장수기업은 가족의 승계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힘쓴다. 단결, 조화, 존경 등 가족 간에 필요한 가치를 지킴으로써 이들은 가족기업을 존속시켜 왔다.

두 번째는 기업가 정신과 품질, 혁신 등 기업의 실질적인 생존에 필요한 가치다. 기업의 본질이기도 한 이 가치들은 많은 가족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마지막 핵심 가치는 다음 세대에 계승하고자 하는 가치로 ‘스튜어드십’과 ‘사회적 책임’이다. 스튜어드십은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의미한다. 이러한 책임감을 계승하면서 장수기업의 핵심 가치는 후대로 계속 전해진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사회적 존경을 받는 기업이 돼야 한다는 것도 필수 가치로 여겨진다.

반 에그헨의 전 CEO인 빌렘 반 에그헨(Willem Van Eeghen)은 “가족기업의 생존은 보장된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고, 회사를 넘겨 받은 모든 세대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 이 기사는 프랑스 인시아드(INSEAD) 경영대학원의 지식 공유 사이트 INSEAD Knowledge와의 정식 계약에 따른 번역 기사입니다. ⓒINSEA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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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키안협회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세계 장수기업 모임. 이 협회 회원사가 되려면 창업한 지 200년 이상이면서 창업자 자손이 현재 경영자이거나 임원이어야 한다. 회사의 대주주 역시 오너 가족이면서 건전하고 사회적 존경을 받는 경영을 해야 한다.
스튜어드십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다음 세대로 물려줘야 한다는 책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