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국무장관으로 지명한 렉스 틸러슨 엑손모빌 CEO는 막강한 러시아 인맥을 자랑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국무장관으로 지명한 렉스 틸러슨 엑손모빌 CEO는 막강한 러시아 인맥을 자랑한다.

“렉스 틸러슨(Rex Tillerson·64)은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이다. 수준(league)이 다른 인물이다. 우리가 잘 지내지 못했던 많은 세계 지도자와 친하다.”

지난 12월 1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렉스 틸러슨 엑손모빌(ExxonMobil) 최고경영자(CEO)를 국무장관으로 지명하자 세계 정치가 요동치고 있다. 파격을 거듭하는 트럼프 행정부 인사의 백미로 꼽힌다.

렉스 틸러슨은 41년간 석유 산업에서 일한 전형적인 ‘오일맨’이자 규율과 절도가 몸에 밴 미국 보이스카우트 연맹 총재 출신이다. 미국 역사상 공직 경험이 전혀 없는 민간 출신 첫 국무장관 지명자다.


공화당 외교통들 적극 추천

‘오일은 정치다’란 석유업계의 통설처럼 예멘과 이라크, 러시아 등 전쟁, 내전과 테러, 암투와 권모술수, 빈곤과 부정부패가 횡행하는 국제 분쟁 지역에서 복잡하고 내밀한 거래를 조율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외교 경험이 전무한 틸러슨을 국무장관에 추천한 인사들은 의외로 공화당의 내로라하는 정책·외교통들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이 11월 말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에게 틸러슨을 적극 추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세계를 손바닥 보듯 훤히 아는 사람(게이츠 전 국방장관)” “폭넓은 경험과 판단력을 갖춘 인물(딕 체니 전 부통령)” “좋은 선택(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 의장)” 등 평가도 좋았다. 그와 두 차례 면담한 트럼프 당선인도 만족했다고 한다.

틸러슨의 러시안 네트워크는 최대 자산이자 약점이다. 옐친 전 대통령과도 가까웠고 푸틴 대통령과는 17년간 친구로 지냈다. 틸러슨도 올해 2월 모교인 텍사스 오스틴 강연에서 “그(푸틴)와 아주 가깝다”고 인정했다. 존 햄리(John Hamre)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소장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빼면 틸러슨만큼 푸틴 대통령을 잘 아는 미국 인사는 없다”고 했다. 2013년 이탈리아 석유회사인 에니(ENI)의 클라우디오 데스칼리치 회장과 함께 러시아 정부가 주는 ‘우정훈장(Order of Friendship)’을 받았다.

러시아 권력 서열 2인자로 알려진 이고르 세친(56)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즈네프트(Rosneft) 사장과는 막역한 사이다. 틸러슨은 올해 초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제포럼에서 만난 세친을 “내 친구”라고 소개했고, 세친은 “틸러슨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미국 대륙을 달리는 것이 내 꿈”이라고 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보도했다.

틸러슨의 러시안 커넥션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999년 (엑손모빌 러시아 담당 사장이던) 틸러슨이 지지부진하던 170억달러 규모의 사할린 원유 채굴 사업을 성사시키면서 푸틴 눈에 들었다”고 했다. 가디언은 “2011년 러시아 북극해 자원 개발권 확보로 정점을 찍었다”고 했다. 틸러슨은 러시아 북극 유전의 가치를 3000억달러로 평가하고 시추작업을 진행했으나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2014년 미국의 러시아 제재가 시작되면서 사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엑손모빌은 다른 석유회사들이 줄줄이 러시아에서 철수할 때도 러시아 석유 사업을 계속한, 예외적인 기업이었다. 틸러슨과 러시아 국영기업인 로즈네프트 사장인 이고르 세친과의 개인적인 친분 덕분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자유무역 지지, 정부규제에는 거부감

엑슨모빌 한 해 매출은 남아공의 국민총생산과 맞먹는다.
엑슨모빌 한 해 매출은 남아공의 국민총생산과 맞먹는다.

에드워드 베로나 엑손모빌 러시아 담당 부사장은 “푸틴 대통령 등 러시아 고위층들이 틸러슨을 좋아했다. 그들은 권력, 규율, 통제 같은 덕목을 좋아하는데 틸러슨에게서 그런 면모를 발견한 것 같다”고 했다.

거칠게 상대를 몰아붙이면서 때로는 극단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협상 스타일은 트럼프와 닮은 꼴이란 평가도 있다. 예멘 정부가 유전개발 협상 테이블에서 까다로운 조건을 고집하자 물건을 던지며 대화 거부를 선언하고, 2011년 이라크 쿠르드 지역 유전을 개발하면서 국무부를 무시하고 독자협상을 벌이는 등 저돌적인 면모도 있다.

틸러슨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공개 지지하는 등 자유무역 옹호론자로 알려져 있다. 2007년 외교 청문회에서 “미국의 석유 안보는 자유무역을 통해 더 확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 월스리트저널 인터뷰에서 “정부가 기업에 ‘아니다(no)’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수천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등 정부규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메이저 석유회사 최고경영자답게 “인간 때문에 기후가 변화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알 수 없다. 좋든 싫든 인류는 앞으로도 당분간 석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기후 변화 협약과 신재생에너지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다.

한 해 매출이 아프리카 강대국 남아공의 국민총생산과 맞먹는 글로벌 석유 메이저 회사(2016년 매출 3630억달러)의 최고경영자로 세계 50개국을 상대로 사업을 벌인 그의 경륜이 정치에 찌든 직업 관료나 정치인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평가와 “아는 것과 외교는 다르다. 국무부 관료들에 둘러싸여 옴짝달싹하지 못할 것”이란 부정적인 시각이 엇갈린다.

틸러슨 지명자의 1차 시험대는 의회 인준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안착을 시험할 또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상원은 공화당(52명)이 민주당(48명)을 아슬아슬하게 앞서고 있다. 공화당 의원 3명이 ‘크로스 보팅’을 하면 의회 인준을 통과할 수 없다. 따라서 틸러슨은 “푸틴 친구인 틸러슨 지명을 우려한다”고 밝힌 존 매케인, 린지 그레이엄, 마코 루비오 등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지지부터 얻어야 한다.

1억5000만달러(1800억원)에 달하는 ‘스톡옵션’도 논란이다. 그가 국무장관에 취임한 뒤 오바마 정권이 동결한 엑손모빌의 러시아 북극유전 개발을 허용하면 천문학적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인준 청문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틸러슨의 국무장관 지명은 러시아 정책은 물론, 유럽연합·중국 등 대아시아 정책, 중동 개입 등 산적한 국제 현안에 대한 트럼프 외교 정책의 방향을 가늠할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그에 따라 한반도 정세도 크게 요동칠 가능성이 크다. 렉스 틸러슨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어떻게 바꿀까. 국무부의 고질적인 관료주의를 깬 새로운 외교관의 전형이 될지 관료주의 저항에 망가진 실패 사례로 남을지 모든 것은 아직 안갯속에 가려져 있다.


Plus Point

트럼프에게 정치 헌금 안 해

1952년 텍사스 위치타 폴에서 보이스카우트 간부였던 바비 조 틸러슨과 패티 슈 사이에서 태어났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1975년 프로덕션 엔지니어로 엑손모빌에 입사했다. 미국 중부 담당 제너럴 매니저(1989년), 예멘 지사 사장(1995년), 러시아와 카스피해 담당 사장(1998년)을 거쳐 2006년 최고경영자가 됐다. 2009년 천연가스 회사인 XTO에너지를 310억달러에 인수했다. 엑손모빌 CEO였던 2008년 8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함께 방한했다.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을 방문, 엑손모빌이 주문한 LNG 선박 건조 현황을 점검했다.

보이스카우트 최고 영예인 ‘이글’출신으로 2010~2012년 미국 보이스카우트 총재를 지냈다. 총재 시절 동성애자 가입금지 규정 철폐를 주도했다.

골수 공화당 지지자로 2003년 이후 공화당 선거운동에 44만달러를 기부했다. 조지 W. 부시, 미트 롬니 대선 후보에게 정치 헌금을 냈지만 트럼프에게는 내지 않았다. 렌다 클레어 여사와 결혼해 자녀 네 명을 두고 있으며, 엑손모빌 본사가 있는 텍사스주 댈러스시 어빙에 살고 있다. 2016년‘포천’선정‘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24위, 2015년 연봉은 2720만달러(326억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