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독·소전쟁 개전 당시 히틀러(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회의 중인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참모총장 할더(오른쪽에서 첫 번째). 이때만 해도 참모본부는 그런 대로 작동했으나 이후 히틀러가 이들을 해임하고 조직을 완전히 장악해 독일 특유의 의사 결정 시스템이 파괴됐다. 이는 독일의 패망을 불러온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사진 :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1941년 독·소전쟁 개전 당시 히틀러(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회의 중인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참모총장 할더(오른쪽에서 첫 번째). 이때만 해도 참모본부는 그런 대로 작동했으나 이후 히틀러가 이들을 해임하고 조직을 완전히 장악해 독일 특유의 의사 결정 시스템이 파괴됐다. 이는 독일의 패망을 불러온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사진 :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업무의 양이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조직이 세분화되는데, 당연히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이는 CEO처럼 전체를 관리하는 이의 입장에서 그렇게 되기를 원할 뿐이지, 실제로 조직이 커지고 세분화되면 그만큼 비효율성도 함께 늘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업무를 나누면 과부하가 사라져 일이 신속하게 처리될 것 같지만, 정작 결재나 협의 단계가 늘어나면서 이전보다 의사 결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이 발생한다. 어처구니없지만 중요한 사안이 최고책임자까지 보고가 늦어지면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한 조직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부서 간에 이기적인 장벽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생색낼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간섭하려고 들다가도 문제가 벌어지면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미는 행태가 흔하다. 언론에서 자주 보도하다 보니 우리나라 정부 부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로 생각하지만 사실 외국도 마찬가지다.

최근 미국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보면 민간의 참여가 두드러진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소련과의 피 말리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1958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만들어 결국 인간을 달에 먼저 보내는 데 성공했다. 냉전의 긴장과 맞물려 모든 길이 NASA로 통하던 시대다 보니 의사 결정은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경이적일 정도로 신속했다.

하지만 인간을 달에 보낸 이후 규모가 대폭 축소됐음에도 NASA는 결정을 하나 하는 데 수년 이상이 걸릴 정도로 관료화가 극심하게 진행된 늙은 조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상업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 분야는 민간이 담당하고, 장기간 시간이 소요되는 과학 분야는 NASA가 담당하기로 교통 정리했을 정도다.


소니, 비대해진 조직과 부서 이기주의로 몰락

그런데 합리적일 것 같은 민간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전자 산업계의 거인이던 소니가 몰락하게 된 이유를 보면, 비대해진 조직과 부서 이기주의 그리고 이에 따른 늦은 의사 결정을 꼽을 수 있다. 시대를 이끈 창조와 혁신의 아이콘이던 소니가 무기력한 조직으로 바뀌는 데 불과 10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똑똑하고 부지런한 CEO라도 일일이 모든 부분에 관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기업이 비대해져서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다. 이때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참모 시스템이다. 이들은 기업 전반에 발생하는 현황이나 문제점을 곧바로 취합하고 CEO에게 대안을 제시해 의사 결정을 돕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비서실, 기조실 등 다양한 이름으로 운영하는 참모 시스템은 그 기원을 군에서 찾을 수 있다. 모사(謀士)나 책사(策士)처럼 오래전에도 이런 역할을 수행하던 이들은 있었지만 현대식 기관으로서 참모본부는 독일군 초대 참모총장으로 일컬어지는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에 의해 탄생했다.

이후 독일군 특유의 시스템으로 발전을 거듭한 참모본부는 다른 나라의 모방이나 시기의 대상이 됐을 정도였다. 특히 제1차세계대전에서 곤혹을 치르며 간신히 승리한 프랑스가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을 옥죌 때 독일군 참모본부의 해체도 포함시켰을 정도였다. 그러나 독일은 병무국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이 조직을 유지했다.

그 정도로 독일의 참모본부는 뛰어났다. 귀족, 평민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교육과 경쟁을 거쳐 실력으로만 선발한 엘리트들이 근무했다. 이들은 예하 부대의 지휘관에 비해 계급이 낮지만 작전을 기획하는 권한은 오히려 컸다. 전력이 뒤졌던 독일군이 전시에 효율적으로 가동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이와 관련이 많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참모본부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지휘 시스템을 확립한 프로이센의 명장 샤른호르스트. 흔히 독일군 초대 참모총장으로 불린다. <사진 : 위키피디아>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참모본부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지휘 시스템을 확립한 프로이센의 명장 샤른호르스트. 흔히 독일군 초대 참모총장으로 불린다. <사진 : 위키피디아>

야전·정책 부서 간의 견제와 균형 달성

그런데 이와 관련해 반드시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참모본부의 권한과 역할은 상당하지만 이들은 오로지 최고결정권자의 판단을 돕는 일만 담당했다. 즉, 각종 정보를 취합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지 최종적인 판단은 사령관의 몫이었다. 당연히 일선 부대에 대해서 간섭하거나 관여할 수 없었다. 야전부대와 정책 부서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군을 효율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제1·2차세계대전 초기에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은 이런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결국 패배했다. 1941년 모스크바 전투의 패배를 빌미로 히틀러(Adolf Hitler)가 군부를 대숙청하고 직접 독일 육군 최고사령관에 올랐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국가 원수는 군통수권자이지만 히틀러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고 싶어 했다. 이때부터 참모본부의 정책 조언 기능은 사라지고, 히틀러의 명령만 출납하는 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어 버렸다. 또한 히틀러에게 아부하는 이들이 참모본부 내 여러 요직을 차지하고 월권을 행사하면서 예하 부대의 지휘 계통에도 문제가 생겼다.

1944년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독일 기갑부대의 출동이 지연됐던 사건은 그런 곪아버린 모순이 표출된 사례다. 어처구니없게도 주요 기갑부대의 지휘권을 히틀러가 직접 행사하다 보니 방어를 담당한 지휘관들은 옆에 있는 멀쩡한 전차를 그냥 지켜만 봐야 했던 것이다. 이때 조언 기능이 사라진 참모본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롬멜(Erwin Rommel)처럼 비선을 통해 직접 히틀러와 연결하려는 행태까지 나오면서 지휘계통이 무력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사실 치열한 것으로 따진다면 기업도 마찬가지다. 최초로 참모본부를 만들고 주변국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한 독일의 모습은 조직을 관리하는 이의 입장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근무, 현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등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