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 간 종교 전쟁으로 불리는 십자군 전쟁. <사진 : 영국 런던 퀸메리대학교>
서유럽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 간 종교 전쟁으로 불리는 십자군 전쟁. <사진 : 영국 런던 퀸메리대학교>

사자왕 리처드 1세는 영국 국민에게 인기가 많다. 그는 영화와 소설에도 자주 등장한다. 리처드는 뛰어난 전사이자 지휘관이었고 모험과 도전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한 사나이였다. 결단력도 탁월해 밀어붙일 때와 신중할 때를 잘 알았다. 적에게는 단호하고 주변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의 인생은 화려했다. 하지만 불행한 일도 많았다. 가정사는 거의 막장이었고 부왕은 리처드를 증오하고 저주했다. 리처드는 자신을 죽이려 드는 아버지와 싸워 이겼다. 군인들은 그를 존경했지만 정치가들은 그의 의협심을 이용하고 배신을 일삼았다.

역사가들은 전사 리처드의 모습을 그리기 부담스러워했다. 십자군 전쟁(1095~1272년)에서 리처드의 활약상을 그린 상세한 종군기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가들은 그 기록을 꺼린다. 리처드의 부하가 쓴 기록답게 그의 활약상이 지나치게 미화돼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투의 모든 결정적인 장면에 리처드가 등장한다. 진이 허물어지는 곳이 있으면 즉시 리처드가 겨우 15명의 기사를 이끌고 돌진해 방어했다. 후위가 위험하다고 하면 또다시 리처드가 달려가고 선두에 서서 적군을 베어 넘긴다.

최고의 장면은 야파 전투다. 리처드는 예루살렘 진격을 포기하고 귀국하기로 한다. 그가 배에 막 오르는데, 살라딘(십자군에 맞선 이슬람 전사)의 기습으로 야파(예루살렘으로 가는 항구)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리처드는 할 수 없이 야파로 배를 돌렸다. 살라딘도 먼 곳에서 영국 함대가 야파 해안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살라딘은 또다시 긴 포위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배 위에 있던 리처드가 갑자기 물로 뛰어들었다. 갑옷도 입지 않은 채로 그는 물을 헤치며 야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놀란 측근과 기사들이 그를 따라 뛰어내렸다. 그래봤자 겨우 15명 정도였다. 살라딘은 야파에 수비대를 파견했지만 이들은 약탈에 정신이 팔려서 지휘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이때 리처드가 마치 사자처럼 시가로 뛰어들었다. 놀란 이슬람군은 도망쳤고 야파는 단숨에 십자군에 떨어졌다.


‘잡탕’ 십자군 조직력 만든 사자왕

분노한 살라딘은 다음 날 수천명의 군대로 야파를 공격했다. 야파의 수비대는 겨우 400명 정도였다. 이날도 리처드는 겨우 10명 정도의 기사와 함께 중앙에서 싸웠고 진에서 튀어 나와 돌격했다. 이때 리처드와 일행은 모두 말을 타지 않고 싸웠는데, 이를 본 살라딘이 동생을 시켜 아랍종 말 2마리를 선물했다. 그리고 살라딘은 “왕은 어떤 경우에도 보병처럼 싸워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역사가들은 “이건 너무나 편향되고 과장된 기록이다”고 말한다. 리처드의 활약상만 기록하고 함께 싸운 기사들의 무용담은 생략했다고 봐야 맞는 말이다. 그러나 리처드의 활약이 무협지처럼 과장됐다는 비판은 전쟁을 모르고 하는 것이다.

십자군의 약점은 전술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모인 잡탕군대인 데다 중세 유럽군대 자체가 소수의 기사와 그가 거느린 보병으로 구성된 콩알 같은 단위부대의 모임이었다. 이들을 모아 재편성하고 장교와 하사관을 배치해서 전술적 기동과 훈련을 해 보지도 못했다. 아예 그런 재조직 자체가 힘들었다. 워낙 체격과 전투력이 뛰어나서 수성전이나 제자리만 지키면 되는 수비전에서는 꽤 힘을 발휘했지만 대규모 야전이 되면 조직적인 대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엉망진창이 됐다.

전투를 경험하다 보면 기사와 병사들도 전술에 눈을 뜨지만 조직이 돼 있지 않아 믿을 수도, 신뢰할 수도 없다. 조직된 군대 같으면 위험한 지역에 예비대를 투입한다. 하지만 이때는 예비대가 아니라 기사들의 무리에게 부탁 같은 명령을 해야 한다. 그들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나 지원부대가 올 것이라고 믿고 위치를 사수해야 하는 병사들이나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은 도주하거나 방어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지역으로 이동한다. 결국 진에 구멍이 생기고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십자군은 이런 전투를 수도 없이 했다. 리처드는 십자군이 전술적인 행동을 하려면 먼저 부대에 대한 신뢰, 전술에 대한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예비대가 되고 돌격부대가 돼 선봉에 섰다.

만약 리처드가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드는 무모한 전사였다면 용전분투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패전을 막지 못했고, 어디선가 고립돼 전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처드의 분투는 그것이 아니었다. 오색잡탕에 이기적인 십자군에 전술의 위력을 보여주고 신뢰하게 하려는 행동이었다. 야파 전투에서도 리처드는 사자처럼 날뛰는 것 같지만, 보병들에게 방어대형을 지시해 뒀다. 창병은 땅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창끝을 땅에 박고 앞으로 창을 내밀어 창의 벽을 만들었다. 그 뒤에는 석궁수를 배치해 돌격해 오는 기병을 사격하게 했다. 이 대형은 간단한 듯 하지만 규율과 믿음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 적 기병이 돌격해 올 때 장창보병은 로봇처럼 앉아서 자신의 위치를 사수해야 하고, 창 사이로 돌격해 들어오는 적병은 석궁수가 처리해 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석궁수는 보병이 쏟아지는 화살을 갑옷으로 버텨내며, 창을 붙들고 버티면서 적의 말과 기병을 바위처럼 저지해 줄 것이고, 옆에 있는 석궁수도 자리를 지켜서 자신은 자기 앞으로 들어오는 적만 공격하면 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리더 돼야

무엇보다도 이 대형이 10배가 넘는 적을 막아낼 만큼 견고하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 믿음을 무엇으로 만들까? 리처드는 기사 10명과 선두로 나가 싸우는 것으로 해결했다. 갑옷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꽂히고 그를 향해 사라센군이 몰려 왔지만, 물러서지 않고 심지어 적진을 향해 돌진까지 감행했다.

체력의 한계 때문에 이런 전투를 오래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보병들의 뒤로 돌아와 이제는 명령으로 방어전을 지휘하기 시작하자 보병과 석궁수는 단결된 팀이 돼 있었다. 그들은 야파를 사수했다.

리처드의 활약을 보면 ‘왕이 저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리더가 너무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리더의 솔선수범에도 두 종류가 있다. 조직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경우와 과거 경험에 갇혀 있는 조직을 미래의 새로운 가치, 문화와 연결하는 솔선수범이다. 조직이 아직 맛보지 못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끌어들여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기업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때 TF팀 또는 선도적인 팀을 꾸려 운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이 엘리트 조직에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미래와의 연결이다. 21세기는 다문화, 융합 사회로 계속 발전할 것이고 모든 기업은 리처드왕이 야파 전투에서 겪었던 이기적, 비조직적인 어려움을 맞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은 연결이다. 강제로 조직을 통폐합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목격하고, 체험하고, 깨닫게 하는 전략과 리더의 역할이 요구되는 시대다.


▒ 임용한
경희대 대학원 사학 박사, 경희대·공군사관학교 한국사·군제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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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1095~1272년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원정이다. 이 전쟁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