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말 글로벌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인텔, TSMC는 네덜란드의 한 반도체 장비업체의 지분을 앞다퉈 매입했다. 인텔이 15%, 두 번째로 TSMC가 5%, 삼성도 뒤질세라 3%를 매입했다. 반도체 기업의 ‘수퍼 을(乙)’ ASML 얘기다.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들이 투자에 나선 이유는 ASML이 보유한 ‘리소그래피(lithography)’ 장비 분야 기술력 때문이다. 리소그래피는 첨단 반도체 제조공정의 핵심 장비로 ASML이 70%가 넘는 점유율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네덜란드 펠트호번시 ASML 본사 16층 사무실에서 피터 베닝크(Peter Wennink·56)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만났다.


‘혁신 아웃소싱’ 으로 납품업체와 동반성장
베닝크 CFO는 ASML의 성공 비결을 묻는 첫 질문에 “혁신을 아웃소싱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ASML은 주력 제품인 리소그래피 장비에 필요한 부품의 80%를 아웃소싱하고, 본사는 디자인과 설계에 역량을 집중한다. 그는 이어 “배우자를 속이면 안 되듯이 협력업체를 속이면 안 된다. 우리는 서로의 마진과 역량을 공개하고 ‘이익’과 ‘리스크’를 공유한다”고 설명했다.

협력업체를 배우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는 핵심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를 부품별로 단 1곳만 선정해 5~10년 장기 파트너 관계를 맺는다. 이들도 ASML에만 부품을 공급한다. 예를 들어 렌즈는 독일 기업인 칼자이스(Carl Zeiss)로부터만 공급받는다. 반도체 장비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정밀기계다. 이런 산업에선 여러 납품업체를 경쟁시켜 단가를 낮추는 것보다 한 업체라도 최고의 기술을 갖도록 돕는 게 더 중요하다.”

공급업체의 기술 개발은 어떤 방식으로 돕나.
“공급업체 연구·개발(R&D)에 우리가 직접 투자한다. 우리는 매출의 10%를 R&D에 투자하는데 이 중 최소 50%는 납품업체에 돌아간다. 또 이들이 연구·개발비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도록 부품 단가를 최대한 높게 책정한다.”

하지만 한 개 납품업체에 올인(all-in)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나.
“정밀 렌즈 같은 중요 부품에서 최고 기술을 가진 기업이 많지는 않다. 그래서 한 곳에 집중한다. 다만, 우리는 QLTC라는 관리 체계를 통해 공급업체의 생산 시스템과 기술 전반을 관리한다. 품질·물류·기술·비용 측면에서 최소 1년에 한 번 1~5등급으로 평가한다. 문제가 발견된 공급업체는 ASML이 적극 개입해 개선한다.”

인텔·삼성 등이 지분을 투자한 계기가 있었나.
“우리는 2002년 큰 위기를 겪었다. 반도체 경기 악화로 장비를 발주했던 기업들이 주문을 대량 취소했기 때문이다. 이미 대규모 R&D 투자를 단행해 장비를 개발했던 ASML은 크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고, ASML에 부품을 납품했던 업체들 역시 위기를 맞았다. 그래서 우리는 개발 단계부터 발주업체와 리스크를 함께 공유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그리고 발주사들이 장비 개발로 이익을 얻고 싶다면 우리가 지분을 25% 이내에서 팔 테니 원하면 사라고 제안했다.


▒ 피터 베닝크 Peter Wennink
ASML 최고재무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