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262는 최초로 실전에서 활약한 제트전투기다. 그러나 인상적인 전투 결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레이더와 공대공 미사일이 등장하면서 가시권 밖 교전이 본격 시작된 제3세대 전투기 시대 이전까지의 공중전은 근접해 기관총을 난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상대방의 뒤에서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어서 공중전이 개시되면 서로 좋은 위치를 잡기 위해 치열한 기동을 펼쳤다.

마치 그 모습이 개싸움 같다며 이러한 근접 공중전을 도그파이팅(Dog fighting)이라 부른다. 조종사의 기량도 중요하지만 일단 전투기의 급강하, 급상승, 급선회 같은 기동력이 좋아야 도그파이팅에서 이길 수 있다. 무엇보다 속도가 빠른 것이 좋은 위치를 잡을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당연히 상대방의 뒤로 날아가기 쉽고, 반대로 상대에게 뒤를 잡혀도 빠른 속도로 도주한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열강들은 보다 빠른 전투기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덕분에 제1차세계대전 종전 무렵 독일의 ‘Bf 109’, 영국 ‘스피트파이어’, 미국 ‘P-51’ 같은 전투기의 경우 시속 600~700㎞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펠러 방식으로는 더 이상 속도를 올리기가 불가능했다. 피스톤 엔진이 발휘할 수 있는 구조적인 한계와 공기의 저항 때문이었다. 이런 물리적 제약을 뛰어넘는 방법은 새로운 동력, 즉 제트 엔진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제트 엔진은 이미 비행기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구상된 기술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루마니아 출신 항공공학자 앙리 코안다가 실험용 제트기를 만들었던 때가 라이트 형제의 비행이 성공한 지 불과 7년 후인 1910년이었다. 이처럼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고 더 무거운 비행체를 날릴 수 있는 제트 엔진을 이용한 전투기의 개발은 어쩌면 역사의 수순이었다. 당연히 열강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시속 800㎞ 비행 제외하면 성능은 최악

제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에 인류 최초 제트기인 ‘He 178’의 비행에 성공했을 만큼 독일은 이 분야를 선도한 국가다. 1943년 11월에는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제트 전투기인 ‘Me 262’를 개발했다. Me 262는 당시 그 어떤 전투기도 흉내 낼 수 없던 시속 800㎞의 속도로 비행이 가능했다.

앞서 언급한 Bf 109, 스피트파이어, P-51처럼 그 이전에도 수많은 전투기가 존재했다. 하지만 Me 262를 시작으로 초음속 전투기가 등장하기 이전인 1950년대까지 활약한 초기 제트 전투기를 흔히 제1세대 전투기라고 정의한다. 마치 기원전, 기원후처럼 Me 262를 시작으로 전투기의 역사가 완전히 새롭게 쓰인 것이다.

독일 공군의 전투기 감독관인 아돌프 갈란트는 1943년 11월 Me 262를 직접 몰아본 후 즉시 양산을 주장했다. 당시는 독일 본토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위험했지만 전투기가 부족해 요격에 애를 먹고 있었다. 따라서 압도적인 성능의 Me 262가 질로써 양적 열세를 만회해 줄 회심의 무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양산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고전했다. 히틀러가 Me 262를 폭격기로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지만, 2발의 범용폭탄을 장착하는 수준이므로 폭격기로의 개조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 실용화가 늦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엔진 때문이었다.

Me 262에 탑재된 융커스 유모 004엔진은 연료 소모가 크고 겨우 80시간 정도만 사용할 수 있어서 신뢰도가 떨어졌다. 출력도 같은 시기에 탄생한 영국 롤스로이스의 더웬트 엔진의 60%에 불과할 정도로 힘이 부족했다. 제트기를 제일 먼저 만들고 제트 전투기도 최초로 실용화했지만 사실 심장인 제트 엔진의 기술력은 영국이 최고였다.

엔진도 문제였지만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엄청난 속도를 제외한다면 전반적인 성능은 최악이었다. 가속력이 낮아 이륙 시 애를 먹었고 충분한 속도를 내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렸다. 급격하게 선회하면 실속이 돼 추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엄밀히 말하면 1944년 8월의 첫 출격도 너무 성급했다.

같은 시기에 영국은 이보다 성능이 뛰어난 제트 전투기 ‘글로스터 미티어’를 완성했고, 미국은 ‘P-80’의 개발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 확실시되던 상황이었기에 서둘러 배치하지 않고 꾸준히 실험을 통해 성능 개선을 하던 중이었다. 결론적으로 Me 262는 너무 급했기에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었다.



싸이월드는 SNS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연이은 정책 실패로 시장에서 존재감을 잃었다. <사진 : 싸이월드 홈페이지>

멍에로 남은 ‘최초’ 타이틀

굳이 무기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최초라는 타이틀은 더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록이다. 하지만 이런 명분에 집착해 서두르다가 혹은 단지 그 수준에서 안주하다가 낭패를 본다면 최초라는 기록은 명예가 아니라 두고두고 ‘멍에’로 남을 수 있다. 어느덧 커뮤니케이션의 대명사가 돼버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을 수 있다.

1999년에 벤처 창업 형태로 탄생한 싸이월드는 2002년 1000만명의 회원을 확보하면서 가히 대세 SNS가 됐다. 하지만 국내 시장에만 안주하고 스마트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후발 주자인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밀려 이제는 존재감마저 희미해졌다. 마치 Me 262처럼 개척자의 영광이 두고두고 짐이 돼버린 사례라 할 수 있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근무, 현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등 저술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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