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14일 파리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이는 독일군.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의 교훈을 잊지 않고 새로운 전략·전술을 개발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사진 : 독일 연방문서보관소(Bundesarchiv)>
1940년 6월 14일 파리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이는 독일군.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의 교훈을 잊지 않고 새로운 전략·전술을 개발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사진 : 독일 연방문서보관소(Bundesarchiv)>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중에는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시나브로 지나간 경우도 있지만, 역사의 물꼬를 완전히 돌려버린 전쟁도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초기였던 1940년의 프랑스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의의가 크다고 손꼽는 곳이다.

독일은 쉽게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정작 전쟁 전에는 히틀러의 명령에 반발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뒤엎을 시도까지 했다. 당시 독일은 9번이나 작전을 연기했을 만큼 프랑스를 겁냈다. 당시만 하더라도 프랑스 육군은 독일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 더불어 군사 강국인 영국이 옆에서 프랑스와 함께 발을 맞추고 있던 상황이었다. 군부가 우려한 것처럼 독일이 이기기 힘들었다.

하지만 독일은 영국 원정군을 바다 건너로 몰아내고 프랑스를 완벽하게 굴복시켰다. 이런 경이적인 전과에 독일은 엄청난 자신감을 얻었다. 북아프리카, 발칸 반도, 소련으로 세를 넓히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세계의 지배자처럼 행세할 수 있었다. 적어도 1942년 겨울까지 독일에 대항할 세력은 지구상에 없어 보였다.

만일 프랑스 전역에서 연합군이 승리했다면 히틀러와 나치는 권좌에서 축출됐을 것이고, 당연히 더 이상의 확전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역사에 세계대전이라는 명칭은 제1차세계대전에만 붙었을지도 모른다.


전차 활용해 신속하게 돌파하는 ‘전격전’ 구사

1940년 프랑스 전역은 역사적으로 의의가 컸지만 군사적으로도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에 연합국과 독일이 싸웠던 서부전선은 4년 동안 참호를 넘지 못하고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지옥이었다. 20년 후 같은 곳에서 같은 이들이 다시 싸웠지만 불과 6주 만에 독일이 승리를 거뒀다. 실질적으로 승패가 4주 만에 결정되다시피 했을 만큼 일방적이었다.

더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이 개전을 망설였을 정도로 전력은 연합군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공군의 엄호를 받는 기갑부대를 한곳에 집중시켜 전선을 빠르게 돌파한 후 프랑스군의 배후를 치고 들어가 일거에 포위, 섬멸하는 독창적인 전략을 사용해 승리했다. 이른바 ‘전격전(電擊戰)’이었다.

이는 제1차세계대전의 교훈에서 비롯됐다. 20년 전 참호전에서 패한 독일은 차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하면 고착화된 전선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전차에 주목했다. 지난 전쟁에서 전차는 가능성만을 보였지만 어느덧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상태였다. 독일은 이를 이용한 전략·전술 개발에 힘썼다.

반면 지난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방어가 최선이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영국은 전차를 최초로 만들었고, 프랑스는 FT-17 같은 당대 최고의 전차를 만든 나라였다. 이들은 제2차세계대전 전부터 독일보다 성능이 좋은 전차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어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다 보니 전차를 이용한 전략 개발을 등한시했다.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코닥

코닥의 상징과도 같은 35㎜ 필름. 이제는 일부 전문가나 찾는 아날로그 시대의 유물이 됐다. <사진 : 위키피디아>
코닥의 상징과도 같은 35㎜ 필름. 이제는 일부 전문가나 찾는 아날로그 시대의 유물이 됐다. <사진 : 위키피디아>

이처럼 새로운 무기의 시대를 같이 맞이했으면서도 이를 이용해 혁신에 나선 독일과 변화를 거부하며 과거에 안주한 연합국의 차이가 바로 1940년 프랑스 전역의 결과였다. 이를 보면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누구보다 앞서 목도하고도 나락으로 떨어진 ‘코닥’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1888년 창립한 코닥은 보통 사람들이 쉽게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 시대를 열면서 2000년대 초까지 카메라, 필름과 관련된 영상 산업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거인으로 성장했다. 1990년에는 미국 내에서 24위 기업에 올랐다. 2016년 미국 내 24위 기업이 보잉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코닥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유추할 수 있다.

코닥은 연구원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수많은 특허를 보유했고 이를 바탕으로 카메라와 관련된 패러다임을 완성했다. 당시 업계에선 코닥이 하는 게  곧 법이고 진리였다.

그러나 코닥은 2012년 법원에 회생을 신청한 후 현재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는 처지가 됐다. 코닥 스스로 만들어 놓은 체제에 안주했고,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혁명을 철저히 무시한 참사였다.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었다면 코닥은 지금도 강자로 존재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새로운 시대도 충분히 앞장서서 선도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코닥은 1975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한 기업이다. 당시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가 미래를 바꿀 만한 잠재력이 있음을 깨달았지만 시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일부러 상용화하지 않았다. 무궁무진한 새로운 시장보다 그동안 자신들이 이뤄 놓은 눈앞의 먹거리에만 집착했던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를 먼저 만들어 놓고도 변화를 이끌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는 동안 시대는 격변했다.

예전에 필름과 그다지 관련이 없던 전자회사들의 주도로 지난 100년간 코닥이 만들어 놓은 카메라와 관련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코닥이 이에 동참하려고 했을 때는 버스가 한참 전에 떠난 후였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린 것은 완벽한 몰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