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미국 민주당 여성의원들이 붉은색 옷을 맞춰 입고 의사당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지난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미국 민주당 여성의원들이 붉은색 옷을 맞춰 입고 의사당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삼성전자의 주주인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지난해 10월 이색적인 주주제안을 했다. 삼성전자 이사회의 성별 다양성이 부족하다며 개선을 요구한 것이다. 삼성전자 사외이사 중에는 여성이 없고 삼성그룹 전체로 확대해도 여성 사외이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이런 현실을 인식한 삼성전자도 이사회의 다양성을 높이겠다고 선뜻 답했다.

기업 임원이나 이사회에 여성이 부족한 건 삼성이나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인력 활용 잘하면 기업 수익성 높아져

성 평등 의식이 비교적 잘 뿌리내린 유럽에서도 기업 임원진의 성별 다양성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맥킨지에 따르면 서유럽 기업의 최고위경영관리위원회(Executive committees) 멤버 가운데 여성 비율은 17%에 불과하다. 서유럽 주요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의 이사회 멤버 중 여성의 비율도 32%에 그친다. 미국의 경우에는 최고위경영관리위원회에서 여성의 비율은 17%, 이사회에서 여성의 비율은 19%였다.

여성 임원이 적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여성이 가사노동에 남자보다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가사노동의 75%가 여성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성 평등이 가장 잘 정착돼 있다는 서유럽에서도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남성의 두 배에 달한다. 서유럽 여성이 하루에 4시간 29분을 가사노동에 쓰는 반면, 남성은 2시간 18분만 쓰고 있다. 남아시아에서는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남성의 다섯 배까지 늘어난다. 맥킨지는 “기업은 임원에게 언제든 일할 준비가 돼 있는 ‘애니타임 모델’을 원하는데 이런 생활은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한 삶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가사노동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여성에게는 애니타임 모델을 받아들이는 것이 남성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성의 리더십을 기업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손해는 고스란히 기업과 사회 전체로 돌아온다. 맥킨지 보고서는 2025년까지 여성에 대한 불평등이 완전히 사라지면 전 세계에서 28조달러(약 3경1542조원)의 국내총생산(GDP)이 증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170개 기업을 대상으로 여성 임원의 숫자와 기업의 재무성과 간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도 마찬가지다. 5년 동안 여성관리자 비율이 증가한 기업이 감소한 기업보다 자기자본이익률(ROE) 평균이 2배 이상 높았다. 또 여성 임원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기업이 전혀 없는 기업보다 매출액수익률(ROS) 평균이 2배 높았다. 여성 임원 확대는 기업과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시급한 과제인 것이다. 맥킨지는 성별 다양성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기업들을 분석해 세 가지 공통점을 추려냈다.


남아시아에서는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남성의 다섯 배에 달한다. 인도에서 한 여성이 집안일을 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남아시아에서는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남성의 다섯 배에 달한다. 인도에서 한 여성이 집안일을 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성공법칙 1 | 지속성

기업들이 성별 다양성 문제에 손을 놓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많은 기업이 성별 다양성을 늘리기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맥킨지는 9개 유럽 국가에서 233개 기업을 대상으로 성별 다양성을 늘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조사 대상 기업의 52%가 25가지 이상의 성별 다양성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바로 여성 임원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조사 대상 기업 중 여성 임원 비율이 20%가 넘는 기업은 24%에 그쳤다.

맥킨지는 성별 다양성 프로그램이 실제 효과를 나타내기까지는 최소한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고위경영관리위원회 멤버 가운데 여성 비율이 30%를 넘는 성 평등 우수 기업들의 경우, 성별 다양성 프로그램을 다른 기업보다 빨리 시행했을 뿐 아니라 당장의 성과가 없더라도 오랫동안 꾸준하게 기다렸다. 기업 내에서 여성과 남성의 차별을 없애고 여성 임원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별 다양성 프로그램이 실제 효과를 내기까지는 최소한 3~5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시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린 기업들은 여성 인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신세계가 지속적인 성 평등 제도 시행으로 효과를 본 경우다. 신세계는 여성 직원의 경력단절을 막기 위한 ‘희망육아휴직제도’를 2010년 도입해 7년째 시행하고 있다. 희망육아휴직은 법적으로 보장된 12개월의 육아휴직 외에 여성 직원이 원할 경우 추가로 최대 12개월의 육아휴직을 쓸 수 있게 한 제도다. 특히 신세계는 육아휴직 후 복직하는 여성 직원이 희망 사업장이나 희망 직무를 선택할 수 있는 ‘희망부서 우선배치제’도 함께 시행하면서 여성 직원의 업무 복귀를 돕고 있다. 제도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시행되면서 이용자도 늘고 있다. 최근 3년간 희망육아휴직제도를 이용한 여성 직원만 146명에 달한다. 맥킨지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정책들뿐만 아니라 성별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들도 함께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성공법칙 2 | CEO의 의지

최고경영자(CEO)의 노력도 성별 다양성을 늘리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여성 임원 비율이 높은 기업들은 성별 다양성이 기업의 전략적 의제에서 높은 순위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우수 기업의 12%가 성별 다양성을 전략적 의제에서 3순위 안에 넣었고, 24%는 5순위 안에 포함시켰다. 반면 여성 임원 비율이 낮은 기업은 전략적 의제 3순위 안에 성별 다양성을 넣은 경우가 5%에 그쳤고, 5순위 안에 넣은 경우도 18%에 불과했다. 전략적 의제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데는 CEO의 의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글로벌 기업의 CEO들도 이런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타임워너케이블의 CEO였던 글렌 브릿(Glenn Britt)은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성별 다양성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인사솔루션 기업인 켈리서비스의 칼 캠든(Carl Camden) CEO도 “기업 내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해서 때때로 파격적으로 보일 수 있는 수준의 인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맥킨지는 CEO가 성별 다양성을 기업의 전략적 의제에서 높은 순위에 둘수록 여성 임원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지난 1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여성들의 행진’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사진 : 블룸버그>
지난 1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여성들의 행진’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사진 : 블룸버그>

성공법칙 3 | 생태계 구축

성별 다양성을 늘리기 위한 노력은 전사적인 차원에서 진행돼야 한다. CEO를 비롯한 임원진뿐만 아니라 일반 직원들까지도 성별 다양성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문제는 일반 직원들은 임원진과 달리 이런 문제에 시큰둥하다는 점이다. 맥킨지가 서유럽 기업에서 일하는 2200명의 일반 직원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2%가 “성별 다양성에 기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성별 다양성을 늘리려는 CEO의 메시지가 보통 임원진까지는 어려움 없이 전파되지만, 그 밑으로 갈수록 힘을 잃는 것이다.

맥킨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생태계 전체를 성별 다양성에 맞춰서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우선 채용부터 승진, 유지 단계에 이르기까지 인사관리의 전 과정에 여성의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넣어야 한다. 기업의 여러 가지 복지 제도에서 성차별적인 요소들도 없애야 한다. 맥킨지는 “남녀 간 차별을 없애고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프로그램과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식으로 성별 다양성에 친화적인 생태계가 한 번 자리잡으면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직원들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된다. 성별 다양성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아 여성 임원이 늘고, 여성 직원은 여성 임원을 롤모델 삼아 더 좋은 성과를 내는 선순환의 구조가 기업 안에 자리잡는 것이다.

여성 리더십 강화를 비롯해 성별 다양성 문제 해결을 위해 기업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동시에 정부와 언론의 지원도 필요하다. 정부가 보육 프로그램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면 그만큼 더 많은 여성이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 맥킨지는 “언론이 앞장서서 성별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Plus Point

혁신 천국에서 성희롱 지옥으로 추락한 실리콘밸리

이종현 기자

사내 성희롱 사건이 폭로된 후 우버 창업자인 트래비스 칼라닉은 사임했다. <사진 : 블룸버그>
사내 성희롱 사건이 폭로된 후 우버 창업자인 트래비스 칼라닉은 사임했다. <사진 : 블룸버그>

실리콘밸리가 성추행 사건으로 얼룩지고 있다. 혁신의 천국이라는 찬사가 성희롱 지옥이라는 조롱으로 바뀌고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 지난 10년간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우버와 테슬라가 모두 성희롱 추문에 휩싸였다.


실리콘밸리 기업 여직원 비율 23% 불과

차량 공유업체 우버에서 일한 여성 엔지니어 수전 파울러(Susan Fowler)는 블로그를 통해 우버의 성희롱 문화를 폭로했다. 우버의 끔찍한 민낯이 드러나자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우버의 급성장을 이끌었던 트래비스 칼라닉(Travis Kalanick) 최고경영자(CEO)가 사임했다. 테슬라의 여성 엔지니어도 테슬라에 성희롱 문화가 만연해 있다며 지난 2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문제는 이런 성차별적인 기업 문화가 실리콘밸리 전반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구글은 남성과 여성 직원 사이에 구조적인 임금 차별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뭇매를 맞고 있고, 페이스북도 여성 기술자가 작성한 코드의 채택률이 남성 기술자보다 떨어진다는 분석 결과가 나오면서 논란이 일었다.

여론조사업체인 엘리펀트(Elephant)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3명 중 1명은 반복되는 성희롱으로 안전을 위협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직원이 100명 미만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500개사의 평균 여성 직원 비율은 23%에 불과하다. 기술 스타트업의 초기 단계에는 개발자가 직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개발 인력의 대다수가 남성들이다. 트위터나 우버 같은 IT 기업의 변호를 맡았던 미날 하산(Minal Hasan)은 “기술 스타트업들은 성희롱 같은 문제가 대기업들이나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성차별적인 문화는 장기적으로 실리콘밸리의 경쟁력을 깎아먹을 수 있다. 기술 분야는 늘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 미국의 IT 매체인 와이어드(WIRED)는 “스템(STEM: 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를 배우는 학생이 국제적인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며 “유럽에서만 2020년까지 90만명의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숙련 노동자가 부족해질 것”이라고 했다. 기술 인력 부족의 원인 중 하나가 성차별적인 기업 문화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진행한 최신 연구에 따르면, 영국에 사는 11~30세 여성 중 70%가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다면 STEM 분야에서 직업을 구할 생각이 있다고 대답했다. 성차별적인 문화가 여학생이 기술 분야에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