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군과 신성로마제국군이 이탈리아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벌인 파비아 전투. <사진 : 위키피디아>
프랑스군과 신성로마제국군이 이탈리아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벌인 파비아 전투. <사진 : 위키피디아>

백년전쟁 이후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한 프랑스는 그에 걸맞은 국제적 지위와 영광을 누리고자 했다. 이런 프랑스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던 나라가 신성로마제국이었다.

프랑스를 이끌던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개성과 인격 면에서 만만찮은 숙적이었다. 두 군주는 지중해와 유럽 대륙 곳곳에서 충돌했다. 프랑수아는 승리를 위해 가톨릭 세계의 공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양국이 제대로 충돌한 곳이 이탈리아였다. 이 무렵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절정기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피렌체와 로마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프랑수아와 카를은 모두 이탈리아 문명을 자국에 접목하고 싶어 했고, 가톨릭 세계의 중심인 교황청을 자신의 손아귀에 두려고 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양국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처음에는 프랑수아가 유리했다. 프랑수아는 강력한 대군을 결성했고, 밀라노를 단숨에 함락하고 파비아를 포위했다. 파비아 공략이 쉽지 않았지만 프랑수아는 시간이 지나면 승리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당시 프랑스군은 막강했다. 그들은 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총과 대포의 등장으로 기병의 위력이 약해지고 있었지만 전장에서 중기병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했다. 첨단기술로 무장한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리 중무장한 군대라도 전투 의지와 사명감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6500명의 기병 중에서 1500명 정도가 사명감이 가득한 프랑스 명문 출신의 기사들이었다.

여기에다 53문의 대포로 무장한 포병대가 있었다. 이들은 유럽 최강으로 꼽혔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군이 보유한 대포는 겨우 17문이었다. 보병에서도 프랑스는 승리의 보증수표로 불리는 스위스 용병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전투 직전에 약 6000명의 용병이 스위스로 귀국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프랑수아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우위의 프랑스군, 기습에 무너져

프랑스군은 파비아를 포위하면서 강력한 포위 진지를 구축했다. 구원부대가 올 것에 대비해서 프랑스군 진영 외곽을 방벽과 참호로 둘러쌌다. 양군의 객관적 전력이 비슷한 상태에서 황제군 구원부대는 방어진지로 보호받고 있는 프랑스군을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양군은 3주간 대치를 계속했다. 프랑수아는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느꼈고, 파비아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구원부대는 처음부터 자금이 부족했다. 황제군은 스위스 보병 다음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게르만 용병대인 란츠크네흐트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의 급료를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란츠크네흐트는 동요했다. 일부는 전선을 떠나기 시작했다. 며칠만 더 버티면 황제군은 저절로 와해될 분위기였다.

위기에 몰린 황제군은 대담한 승부수를 던졌다. 1525년 2월 23일 밤, 황제군은 비밀리에 북쪽의 숲으로 이동해 기습을 가한 것이다. 방심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황제군의 이동을 전혀 알지 못했다. 새벽에 황제군이 프랑스 진영 안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프랑수아는 자신이 직접 중기병 기사단을 이끌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동시에 포병대를 깨워 적군을 향해 일제히 포문을 열도록 했다. 신속하고 용감한 대응은 황제군의 예봉을 꺾은 듯했다. 그러나 짧은 승리에 취한 중기병대가 너무 서둘러 2차 공격을 개시하는 바람에 포병은 더 이상 포격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황제군의 보병대가 기사들의 공격을 저지했고, 그 사이에 란츠크네흐트가 진입해 프랑스 보병대를 포위해 섬멸했다.

스페인군이 주축이 된 다른 황제군 보병대는 약간 후방에 처져 있던 전설의 스위스 용병대를 상대했다. 스위스군은 용감했지만, 황제군 보병에는 화승총으로 무장한 소총병들이 포함돼 있었다. 총은 이 무렵에 새로이 등장한 무기였고, 이들을 활용하는 전술적 실험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날 전투에서 황제군은 이제껏 본 적이 없던 가장 대담한 소총전술을 선보였다.

화승총의 치명적인 약점은 장전시간이 길고, 장전하는 동안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소총병은 늘 장창병의 뒤나 대형 안에 숨어서 그들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날 황제군 소총병들은 이러한 전략에 얽매이지 않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소총병에게 기동과 적극성을 부여한 이 공세를 통해 전설의 스위스 용병대를 패퇴시켰고, 프랑수아의 중기병대마저 붕괴시켰다. 이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만5000명이 사망했다. 황제군의 손실은 겨우 500명이었다. 프랑수아는 부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져 포로가 됐다.


완벽한 우세가 1등으로 연결되지 않아

파비아 전투에서 보여준 황제군의 야습과 총병의 활용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16세기 전쟁사에서도 보기 드문 창의적인 전술이었다. 부대 간 긴밀한 통제가 불가능했던 당시 수준에서 이런 대규모 야습과 실험해 보지 않은 전술에 전군의 운명을 거는 모험은 쉽게 벌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파비아 전투는 신기술(총)과 그것을 활용한 창의적 시도가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보여준 전투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근대전쟁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사실 이 전투에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창의가 아니라 창의를 실행할 용기와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이 용기를 제공한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군이었다.

전쟁사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객관적인 정세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순간 ‘버티면 이긴다’ ‘시간은 나의 편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순간 그들은 정지하고, 적에게는 예측 가능한 먹이가 된다. 이것이 궁지에 몰린 상대에게 창의적 전술과 이를 실행할 용기를 제공하는 동기가 된다.

프랑수아는 당시 기준에서 객관적으로 최강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신기술인 대포와 총을 무시하지 않았고, 전쟁사에서 배운 모든 교훈과 미덕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종합한 결론이 ‘우리의 완벽한 우세, 이대로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로 귀결된 것이 참혹한 패배를 낳았던 것이다.

기업인들을 만나보면 기업의 전략적 목표가 프랑수아의 완벽한 상태, 시간이 나의 편이 되는 상태에 맞춰져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보게 된다. ‘세계 1등’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 ‘나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자’ 이런 구호들이 꿈꾸는 정상의 풍경이 혹 ‘파비아의 상태’라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다. 1등이라는 정상은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좁고 뾰족한 곳이다. 쉴 새 없이 바람이 몰아친다. 그곳에서 버틸 수 있는 창의적 태도와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고, 그곳에서 머무를 수 있다.


▒ 임용한
경희대 대학원 사학 박사, 경희대·공군사관학교 한국사·군제사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