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프로펠러 전투기 ‘P-51 머스탱’의 시범 비행 모습. 우연처럼 보이지만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탄생한 걸작 전투기다. <사진 : 위키피디아>
최고의 프로펠러 전투기 ‘P-51 머스탱’의 시범 비행 모습. 우연처럼 보이지만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탄생한 걸작 전투기다. <사진 : 위키피디아>

‘전쟁은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끈다’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제2차세계대전 당시 활약한 독일 전차만 놓고 보더라도 초기에 사용한 1, 2호 전차와 종전 직전의 주력이었던 5, 6호 전차는 마치 초등학생과 대학생만큼 성능 차이가 컸다. 이처럼 무기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이유는 승리하기 위해서다.

무기의 개발을 이끄는 첫째 당사자는 정부다. 당연히 최고 성능의 무기 획득을 목표로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최고 성능의 무기를 개발해 획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개인의 욕심 즉,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성이 개입되면서 예상치 못한 걸작이 등장하기도 한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노스아메리칸항공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P-51 전투기. <사진 : 노스아메리칸 트레이너 협회>
제2차세계대전 당시 노스아메리칸항공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P-51 전투기. <사진 : 노스아메리칸 트레이너 협회>

전운 고조되자 전투기 개발 착수

잔인한 이야기지만 전쟁은 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이들에게 결코 놓칠 수 없는 호기다. 승리를 위해 인위적으로 생산과 소비가 통제하는 전쟁은 결코 경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미국이 대공황을 탈출한 것은 뉴딜 정책 때문이 아니라 제2차세계대전 덕분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당연히 전쟁 중에도 개개의 경제 주체들은 나름대로 이익을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1928년 설립된 후, 주로 소형 군용기 제작에 주력한 노스아메리칸항공(North American Aviation·현재 보잉에 흡수)의 제임스 킨들버거(James H. Kindleberger) 사장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1930년대 들어 전운이 고조되자 그는 재빠르게 행동에 나섰다. 당시 미국은 유럽 사태에 철저히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킨들버거는 전쟁이 발발한다면 지난 제1차세계대전처럼 결국 참전하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사실 미국의 정책 당국자, 특히 군부도 그 가능성을 예견하고 물밑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기도 엄연히 공산품이기에 관련 기업에 전쟁은 더 없는 기회일 수밖에 없다.

킨들버거는 노스아메리칸항공 자체 자금으로 NA-73으로 명명한 전투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금은 워낙 많은 비용과 기술이 소요돼 전투기 개발이 국가적인 프로젝트가 됐지만, 필요한 기술 수준이나 개발 비용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1960년대 이전만 해도 항공기 제작사 자체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이 흔했다.

엔지니어인 에드가 슈무드(Edgar Schmued)가 이끄는 개발팀은 공기 저항 감소에 유리하도록 주익의 가장 두꺼운 부위가 중앙에 위치한 라미나 윙(Laminar wing) 구조를 채택했다. 당시까지는 그다지 많이 채용하지 않은 신기술이어서 한편으론 무모해 보였지만 슈무드는 속도와 항속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개념 연구를 바탕으로 킨들버거는 미국 육군항공대(현 미국 공군)에 NA-73의 도입을 정식으로 제안했으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미군은 만일 전쟁이 벌어지면 어차피 대양 건너 유럽에서 일어날 것이니 전투기보다 폭격기를 중시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통해 확보한 기술을 더욱 갈고닦으며 기회를 기다렸다.


1953년 6월 29일 자 ‘타임’ 모델로 선정된 노스아메리칸항공의사장 제임스 킨들버거.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활약한 ‘P-51’ 전투기를 개발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1953년 6월 29일 자 ‘타임’ 모델로 선정된 노스아메리칸항공의
사장 제임스 킨들버거.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P-51’ 전투기를 개발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미국보다 영국이 먼저 전투기 구매

1939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강제 병합하자 영국은 유화정책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전쟁 대비에 나섰다. 독일에 비해 전투기 전력이 뒤졌던 영국은 서둘러 스피트파이어(Spitfire) 전투기 양산에 착수했지만 당장 전력 격차를 메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해외에서 전투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영국이 전투기를 살 수 있던 곳은 미국밖에 없었다. 동맹국 프랑스는 제 코가 석자였고 적성국인 독일·일본·소련은 제외 대상이었다. 미국은 중립국이었지만 영국에 호의적이었고 상업적 거래로 무기를 판매하는 데도 크게 제한을 두지 않았다. 미국에 파견된 전투기 구매사절단은 당시 미 육군의 주력기인 P-40을 대상 기종으로 선정했다.

그런데 P-40의 생산자인 커티스(Curtiss)는 내수 물량을 대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이에 사절단은 마침 B-25 폭격기 판매를 로비하러 온 킨들버거에게 노스아메리칸에서 P-40을 하청 생산해 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이에 NA-73을 염두에 둔 킨들버거는 넉달의 시간만 준다면 더 뛰어난 전투기를 보여주겠다고 역제안을 했다.

밑질 것이 없다고 판단한 사절단이 제안을 수용했고 1940년 10월 26일, 117일 만에 NA-73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NA-73을 실험한 영국은 요구 성능을 모두 상회하자 ̒머스탱(Mustang) Mk. I̓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예정보다 많은 320기를 주문했다. 이렇게 등장한 전투기가 바로 역사상 최강의 프로펠러 전투기 중 하나인 ‘P-51 머스탱’이다.

P-51의 최초 납품분은 고고도에서 성능이 저하되는 약점을 보였지만 영국의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장착하면서부터 가히 최고의 전투기가 됐다. 일본의 진주만 급습 후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좋은 전투기가 없어 고민하던 미국은 자신들이 이미 최고의 전투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P-51 머스탱은 곧바로 P-51이라는 이름의 주력 전투기가 됐다.

이처럼 무기사의 한 장을 크게 장식한 P-51의 탄생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킨들버거가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운이 아니라 그가 기회를 만든 것이었다. 이는 무기가 아니라 일반 상품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개척해 기회를 만든 이가 성공하는 것은 어쩌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비즈니스의 기본이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근무, 현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등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