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이트하우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중국 등을 상대로 미국 철강기업의 반덤핑 제소를 맡기도 했다.
로버트 라이트하우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중국 등을 상대로 미국 철강기업의 반덤핑 제소를 맡기도 했다.

“한국과 맺은 FTA(자유무역협정) 폐기를 검토하겠다.”

최근 한국 경제는 한·미 FTA 폐기를 검토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심한 홍역을 앓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하필이면 북한이 6차 핵 실험을 한 마당에 그런 얘기를 하느냐”는 반응 끝에 “당분간 한·미 FTA 폐기를 의제로 올리지 않겠다”는 미국 현지 보도가 나왔다. 이후 “폐기가 아니라 다소간의 수정을 원한다”는 로버트 에밋 라이트하우저(Robert Emmet Lighthizer·60)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발언으로 한·미 FTA 폐기 논란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재계에선 ‘언젠가는 터질 폭탄’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미국의 무역 압박은 시간이 갈수록 강도를 더할 것이고 북핵 위기가 잠잠해지면 언제든 재협상 내지 개정 카드를 들고 나올 것이란 예상이다.

사실 한·미 FTA 폐기론이 불거지기 이전부터 ‘미국 제일주의’를 표방한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박은 거세지고 있었다. 특히 철강 기업들은 이미 반덤핑·상계관세 제소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미국은 올 3월 포스코 후판에 11.7%의 반덤핑·상계관세를 적용했고, 4월에는 넥스틸과 현대제철 유정용 강관에 13.8~24.9%의 반덤핑 관세를 때렸다. 대미 철강수출은 올 상반기 작년 같은 기간보다 30%가 줄었다.

한·미 FTA가 폐기돼 미국의 수입관세 2.5%가 부활하면 고전 중인 현대·기아차의 수출 감소는 불가피하다. 무역 규제가 되살아나면 가뜩이나 적자인 석유화학 기업들의 어려움은 가중된다. 기계 산업도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2012년 이후 대미 무역수지 규모를 지속적으로 늘려 작년 20억달러(약 2조3000억원) 흑자를 기록했지만 현재 0% 수준인 관세가 오르면 매출 감소를 피할 수 없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한·미 간 협상 의제로 테이블에 올려 봐야 좋을 것이 없다”며 애써 외면하는 분위기지만 내심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8월 22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가진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의에서 양국 수석대표인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우저 대표가 영상회의를 갖고 있다. <사진 : 조선일보 DB>
산업통상자원부와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8월 22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가진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의에서 양국 수석대표인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우저 대표가 영상회의를 갖고 있다. <사진 : 조선일보 DB>

양자 협상·담판 선호하는 협상 스타일

‘워싱턴 로비 업계의 수퍼 스타가 미국 대외무역 협상의 공격수로 나섰다.’

지난 1월 로버트 라이트하우저가 USTR 대표로 지명되자 미국의 언론들은 예상했던 인사라는 반응이었다. 라이트하우저 대표는 5월 11일 상원 인준 투표에서 찬성 82표, 반대 14표로 가볍게 인준을 통과, 미국 정계에 구축한 폭넓은 인맥을 과시했다.

라이트하우저 대표는 지난 30년간 미국 기업들의 해외 경쟁자들에게 징벌적 관세 부과를 줄기차게 요구한 대표적인 통상 전문 변호사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다자무역협정을 폐기하고 중국 등에 대해 통상압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공약을 내놓은 트럼프 대통령과 코드가 완벽하게 일치한다. 트럼프의 대선 출마 초기부터 트럼프를 지지했고 선거 운동을 도왔다.

다자간 협상보다 당사자 간 협상과 담판을 선호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협상 스타일도 비슷하다는 평가다.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 피터 나바로 백악관 국가무역위원회(NEC) 위원장과 함께 대표적인 대중국 강경론자로 꼽힌다. 실제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중국 등을 상대로 한 미국 철강 기업들의 반덤핑 제소를 맡기도 했다.

2008년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중국 등 무역 경쟁국들에 지나치게 유화적이라고 공개 비판하고 2011년 보수 신문인 워싱턴타임스에 “중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긴다고 효율이 높아지거나 미국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미국은 중국의 불공정 무역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던 재야의 로비스트가 무역 협상을 통해 미국 기업의 이익을 관철하는 저격수로 나선 셈이다.

라이트하우저 대표는 밥 돌 전 공화당 원내 총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81년 미국 상원 재무위원회 수석보좌관, 1983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무역대표부 부대표 임명도 밥 돌 의원의 추천이 작용했다. 1996년 밥 돌 상원의원의 대선 캠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타이밍 노려 거칠게 밀어붙이는 스타일”

라이트하우저 대표는 워싱턴 로비업계의 수퍼 스타였다. 1985년부터 그가 파트너로 일한 로펌 ‘스캐든, 알프스, 슬레이트, 미거 앤드 플롬(Skadden, Arps, Slate, Meagher & Flom)’은 변호사 1700명을 고용한 대형 로펌이다.

미국 전역에 22개 사무실, 중국·한국·일본·독일 등 11개국에 해외 지사를 두고 ‘포천’이 선정한 ‘250대 제조업-서비스 기업’의 절반가량을 대리한다. 주로 세법 개정, 무역 소송을 담당했고 정책 자문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고객이 너무 많아 가려서 받는다”라고 할 정도로 잘나가는 로비스트였다. 특히 미국 2위의 철강 기업인 US스틸을 비롯한 ‘러스트 벨트’의 여러 철강 기업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했다.

동생인 제임스 라이트하우저가 “(로버트는) 권력에 대한 열정이 있다. 로비스트 활동은 돈 때문이 아니라 정부 조직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할 정도로 정치적 야심이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협상 테이블에서 상스러운 유머나 저속한 비속어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상대를 마구 흔들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스타일이다.”

동료 로비스트는 라이트하우저 대표가 협상 상대를 거칠게 밀어 붙이는 스타일이라고 전했다. 본인 스스로 “설득의 예술은 레버리지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이다” “의회에서 일하면서 일의 절차와 타이밍에 대한 감각을 키웠다”고 말하는 등 치밀한 협상 전략가의 면모도 가지고 있다.


Plus Point

빨간 포르셰 모는 열성 농구팬

1947년 미국 오하이오주 애쉬타불라(Ashtabula)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라이트하우저 대표는 사립 고교인 길모어 아카데미 고교를 졸업(1965년)하고 조지타운대 학부(BA)와 로스쿨(J.D.)을 졸업했다.

로펌인 커빙턴 앤드 벌링(Covington and Burling)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1981년 미국 상원 재무위원회 수석 보좌관으로 일하다가 1983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무역대표부 부대표에 임명됐다. 당시 일본·한국·멕시코·영국 등의 철강 업계를 압박, 자율 쿼터제, 저가 수출 방지 약속 등 미국에 유리한 협상을 이끌었다. 하지만 훗날 그가 주도한 협상이 WTO(국제무역기구)가 정한 룰을 위반한 것으로 판정될 정도로 무리한 협상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저녁에는 실내 자전거를 타는 등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붉은 색 포르셰 911를 몰고 질주하는 것이 취미이며 모교인 조지타운대 농구팀의 광적인 팬이다. 유명한 NBA 농구 스타 패트릭 유잉을 초빙 코치로 고용하고 의회에서 일할 때도 농구팀 시즌 티켓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생 짐 라이트하우저는 미국 시민운동 전문가로 메릴랜드주 지방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신고된 개인 재산은 1860만~7380만달러(약 210억~833억원)다. 무역대표부 대표에 취임하면서 에너지, 제조업, 은행 주식 등 56개 자산을 매각키로 했다. 로펌에서 2016년 180만달러(약 20억원)의 연봉을 받았다고 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