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쿠텐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시작해 메신저, 금융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사진 : 블룸버그>
라쿠텐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시작해 메신저, 금융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사진 : 블룸버그>

디지털 기술이 산업 간 경계를 파괴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이 발전하면서 산업 간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경계가 없어졌다고 해서 ‘노라인(no line) 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산업융합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뭐라고 부르든 분명한 건 디지털 기술이 산업 간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고, 기업들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에서 튀어나오는 경쟁자들을 상대하게 됐다는 점이다.

많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이런 변화에 당황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맥킨지가 37개 분야 300명의 CEO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30%가 “정보기술(IT) 분야의 기업이 우리보다 우리 고객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다른 조사 결과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애널리틱서비스(HBRAS)는 전 세계에서 783명의 기업인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응답자의 80%가 디지털이 산업 간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예상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2020년 이후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봤다.


라쿠텐, 아마존 등이 경계 파괴자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가트너가 400여명의 CEO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절반 정도가 “디지털 비즈니스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고 했다.

라쿠텐(樂天)은 1997년 설립된 일본 기업이다.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MBA) 출신인 미키타니 히로시(三木谷浩史)가 6명의 직원과 함께 ‘라쿠텐 이치바’라는 인터넷 쇼핑몰을 세운 것이 시작이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시작한 라쿠텐은 활발한 인수·합병(M&A)을 통해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일본 최대 온라인 여행사인 ‘라쿠텐 여행’, 온라인 미용실 정보 서비스 ‘라쿠텐 뷰티’ 같은 서비스를 성공시켰고 은행·신용카드·보험 같은 금융업에도 진출해 성과를 내고 있다. 2014년에는 이스라엘계 기업이 개발한 메신저 서비스 바이버(Viber)를 9억달러(약 1조원)에 인수했다. 라쿠텐은 바이버에 인공지능(AI) 자동응답 프로그램을 결합한 상담 기능을 선보이기도 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산업 간 경계를 무너뜨린 대표적 기업인 셈이다. 라쿠텐의 지난해 매출액은 7819억엔(약 7조9600억원)으로 전년 대비 9.6% 증가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예전에는 라쿠텐을 ‘전자상거래’ 업체라고 불렀겠지만, 이제는 이런 단편적인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라쿠텐의 뿌리는 전자상거래에 있지만 이제는 인터넷 서비스, 유통, 금융, 메신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디지털 혁신이 본격화되면서 이런 기업이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텐센트와 알리바바가 산업 간 경계를 없애며 급성장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아마존이 무서운 속도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은 전에도 존재했지만 IT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아마존의 신선식품 브랜드 ‘아마존 프레시’ 매장. <사진 : 블룸버그>
아마존의 신선식품 브랜드 ‘아마존 프레시’ 매장. <사진 : 블룸버그>

아마존, 전 세계 산업구조 뒤흔들며 성장

맥킨지는 “디지털 혁신 덕분에 모바일 인터페이스의 편재성(넓은 지역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성질)이 확대됐고, AI 기술로 인해 디지털 데이터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며 “이런 디지털 혁명은 전통적인 산업 분야를 쪼개고 합치면서 급격한 속도로 경계를 다시 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을 나누는 경계가 무너지면서 곳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경쟁이 촉발되고 있다. 아마존은 온라인 도서 판매 서비스를 제공하던 기업이었다.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가 아마존이 처음 배송한 책인 ‘유체 개념과 창조적 분석’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지금도 인터넷 공간 어딘가에 있다. 그런 아마존이 이제는 전 세계 산업 구조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아마존은 월마트, 알리바바 같은 온라인 유통업체들과 경쟁하는 동시에 구글과 컴퓨터 클라우드 분야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다. 디지털 콘텐츠 분야에서는 넷플릭스와 자웅을 겨루고 있고, 디지털 기기 제조업에서도 애플·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 매체인 CNBC는 산업 간 경계를 허물며 진출하는 분야마다 경쟁사들을 밀어내고 있는 아마존에 ‘저거넛(Juggernaut)’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멈출 수 없는 힘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신 크리슈나에서 비롯된 말이다.

중국 대륙을 뛰어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알리바바도 마찬가지다. 알리바바의 금융계열사인 앤트파이낸셜은 글로벌 투자은행들을 제치고 세계 최대 규모의 머니마켓펀드(MMF)를 운용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4월 앤트파이낸셜의 MMF인 ‘위어바오(餘額寶)’ 운용자산이 1670억달러(약 189조원)로 JP모건의 MMF를 제치고 세계 최대 규모라고 보도했다. 앤트파이낸셜은 알리바바의 결제시스템인 알리페이에 고객들이 맡긴 돈을 위어바오에 넣어서 투자하고 있다. 전자상거래에 결제시스템과 금융상품을 결합한 새로운 시장과 서비스를 알리바바가 만든 것이다.

맥킨지는 이렇게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시장이 2025년까지 60조달러(약 6경8850조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회계나 법률 자문 같은 B2B(기업 간 거래) 서비스와 산업 장비 위주의 B2B 시장이 각각 9조6000억달러(약 1085조원)와 9조4000억달러(약 1062조원)로 신(新)시장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소매업에서는 헬스케어(6조달러), 디지털 콘텐츠(3조3000억달러), 여행·숙박(3조6000억달러) 같은 분야가 유망하다. 세계은행은 2025년 글로벌 비즈니스 합산 매출액을 190조달러(약 21경4700조원) 정도로 보고 있는데, 디지털 혁신으로 생기는 새로운 시장이 전체 글로벌 비즈니스 시장의 30% 정도를 차지하게 되는 셈이다.

디지털 기술이 산업 간 경계를 지우면서 많은 기업이 쓰러지고 있다. 지난 8월 미국 최대의 오프라인 장난감 체인점인 토이저러스 본사가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미국의 유명 의류업체인 리미티드와 트루릴리전 역시 최근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아마존처럼 온라인에 기반한 대형 업체들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 길을 찾아나서는 기업들도 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은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며 디지털, 소프트웨어 기업으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포드는 단순히 자동차를 생산하는 업체가 아니라 이동수단에 대한 종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인터넷 기업도 링크드인을 인수하는 등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맥킨지는 이런 노력들이 성공하려면 보다 전략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전략 1 | 소비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라

IT 기술에 기반한 디지털 경제가 급부상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소비자와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디지털 시대가 본격화될수록 소비자의 활동을 분석해서 얻는 데이터의 중요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맥킨지는 소비자의 활동을 분석한 데이터가 앞으로 일종의 화폐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맥킨지는 “개인의 자산이나 소득 같은 정보들도 미래의 소비 활동을 예측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며칠, 몇달, 몇년에 걸쳐서 지속해온 과거의 행동 패턴에 대한 정보”라며 “예컨대 한 사람이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이터가 있다면 헬스케어 업체나 보험사에는 매력적인 정보가 될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이런 데이터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기업뿐만 아니라 소비자들도 더 현명하게 자신의 소비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됐다. 선택 결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는 예전보다 투명하게 공개돼 있고,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선택할 때 소비자가 가지는 기대감도 훨씬 커졌다. 투명성을 지키면서 서비스의 품질을 좋게 유지하는 건 어느 분야에서나 쉬운 일이 아니다. 소비자와의 친밀한 관계 형성에 실패한 기업은 중간 고리가 끊어진 채로 ‘뒷전에서 서류 작업이나 하는 회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맥킨지는 소비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소비자에게 어떤 것을 줄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제주도에 있는 여행 스타트업 ‘카일루아’는 단순한 여행 콘텐츠를 넘어서 제주도의 정체성을 살린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제주도를 방문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여행 목적에 맞는 콘텐츠를 맞춤으로 제공하는 플랫폼도 함께 제공한다. 맥킨지는 “소비자와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빠르고 편리한 것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며 “구글이 만든 크롬이나 지메일 같은 서비스, 알리바바가 내놓은 알리페이나 위어바오 같은 서비스의 목적은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유한 소비자들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파산보호 신청을 한 토이저러스 미국 매장. <사진 : 블룸버그>
최근 파산보호 신청을 한 토이저러스 미국 매장. <사진 : 블룸버그>

전략 2 | 핵심 가치를 파악하라

경계가 사라진 산업 생태계에서는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경영전략을 짜야 한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틀에서 만드는 사업 계획은 새로운 산업 생태계에는 어울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맥킨지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업이 자신의 핵심가치와 경쟁우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산업 생태계에서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낯선 경쟁자와 마주칠 수 있다. 기업은 전통적인 주력 분야를 벗어나 여러 분야에서 사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 출현할지 모르는 경쟁자를 미리 예측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갑작스러운 경쟁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기업이 자신의 핵심 가치와 경쟁 우위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맥킨지는 “기업은 보유하고 있는 자산과 오랫동안 쌓아온 고객 관계를 활용해서 어떻게 해야 경쟁자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 내부의 저항도 염두에 둬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고방식은 기업 내부에 인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기업 구성원들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을 가능성이 큰 만큼 새로운 경영 목표와 성과 관리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 맥킨지는 “핵심 가치를 염두에 두고 스스로의 시각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내부의 저항 등 넘어야 할 벽이 많지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전략 3 | 파트너를 활용하라

새로운 산업 생태계에서는 경쟁이 치열해지는 동시에 협력의 기회도 늘어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분야에서 경쟁자가 튀어나오듯이 함께 사업을 진행할 파트너도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다. 특히나 아직 소비자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개발도상국 시장일수록 파트너와의 협력 관계가 중요하다.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나 브라질 같은 남미지역, 터키, 아프리카 같은 지역이 대표적이다. 맥킨지는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통해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며 “혁신에 불을 지필 외부 데이터와 아이디어, 서비스를 파트너와 지속적으로 교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대일의 파트너십 대신 제3자를 끌어들이는 파트너십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개발도상국 기업은 디지털 시대의 사고방식을 미처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들 기업과 효과적으로 디지털 혁신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술에 앞서 있는 통신회사(telco)나 액센추어 같은 조정자(Integrator)를 파트너십에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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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마켓펀드(MMF) Money Market Fund의 약자로 단기금융상품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단기 금리의 등락이 펀드 수익률에 빠르게 반영될 수 있게 한 초단기 공사채형 금융상품이다. 주식 대신 기업어음(CP), 양도성예금증서(CD) 같은 금융상품에 투자한다.

Plus Point

산업 간 경계 허물어야 디지털 혁신 가능

글로벌 스타트업인 우버는 한국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사진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운행 중인 우버모터 드라이버 모습. <사진 : 블룸버그>
글로벌 스타트업인 우버는 한국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사진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운행 중인 우버모터 드라이버 모습. <사진 : 블룸버그>

산업 간 경계를 허무는 데 앞장서고 있는 에어비앤비와 우버, 앤트파이낸셜 같은 스타트업들은 한국에서는 설립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산나눔재단과 구글캠퍼스 서울이 지난 7월 발표한 ‘스타트업코리아 정책 제안 발표회’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100대 스타트업 가운데 절반 이상이 규제 때문에 한국에서는 정상적인 사업이 불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 우버와 디디추싱의 사업 모델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에 저촉되고, 앤트파이낸셜은 금융회사의 정보 처리 업무위탁에 관한 규정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산업 간 경계를 무너뜨리고 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애초에 이런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 셈이다. 미국은 2012년 산업 인터넷 전략을 수립한 이후 산업 간 경계를 넘나드는 기업들의 천국이 됐고, 일본 정부도 총무성 중심으로 산업 간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열심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각종 규제 때문에 이런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나마 문재인 대통령이 9월 26일 국무회의에서 “혁신성장이 소득주도 성장전략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한 이후 관련 규제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