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 교수를 꼽으라면 이 사람을 꼽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리처드 세일러(Richard H. Thaler) 미국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교수가 주인공이다. 그가 쓴 책 ‘넛지(Nudge)’를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월 초 휴가를 떠나기에 앞서 청와대 전 직원에게 선물하는 바람에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 원래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시키다’라는 뜻의 영어 동사다. 세일러 교수가 행동경제학의 용어로 개념화한 넛지란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의미한다. 특히 정책 결정자가 공공 정책을 결정할 때 부드럽게 개입해 국민들에게 좋은 결과를 유도하는 ‘사회적 넛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아, 올해 비즈니스북 가운데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기록 중이다. 2009년 9월  9일 한국을 방문한 세일러 교수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만났다. 그는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동문회 행사를 위해 호주·싱가포르·홍콩·대만·중국·한국·일본 등 아시아·태평양 7개국을 3주간 여행하는 일정으로 방한했다.


‘넛지’는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인가.
“그렇진 않다.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뜻은 알지만 그리 흔히 쓰는 영어 단어는 아니다. 우리 철학에 딱 맞는 단어라서 선택했다. 우리 철학이란, 요약하자면 ‘선택 설계자(choice architect)’가 매우 점잖게 슬쩍 미는 정도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인데, 그 의미에 딱 맞는 단어가 바로 넛지다.”

정통 경제학의 가설을 비판하는, 행동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
“대학원 시절부터였다. 나는 종종 저녁 식사에 손님을 초대하는데 와인과 함께 즐길 만한 안주로 캐슈너트라는 열매를 그릇에 담아서 내놓는다. 식사 전에 캐슈너트를 다 먹어버려 밥맛이 없을까봐 캐슈너트 그릇을 치워버리면 평소 이성적인 성향의 경제학자 손님들조차 ‘고맙다’고 한다.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인간’과는 달리, 현실의 인간은 얼마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인간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누군가의 개입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넛지에 둘러싸여 산다. 가령 학교 식당에서 음식을 어떤 식으로 배열하는가도 학생들의 음식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몸에 좋은 과일을 좀 더 눈에 띄는 곳에 두고 살찌는 단 음식을 뒤로 둘 수도 있고, 반대로 살찌는 음식을 앞에 놓을 수도 있고, 음식을 그냥 무작위로 놓는 방법도 있다. 이 가운데 학생들의 건강을 돕는 넛지가 가능한 것이다. 식당에 음식을 놓는 사람, 수술을 권하는 의사, 정책을 결정하는 대통령 모두 ‘선택 설계’를 구현하는 선택 설계자에 해당한다. 건축가가 설계하는 대로 사무실도, 방도, 화장실도 만들어지듯이 선택 설계를 피할 수는 없다.”

가장 합리적 집단으로 여겨지던 미국 월가에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됐다는 건 기존 경제학의 실패를 뜻하는 건가.
“기존 경제학의 실패를 꼬집는 글은 많았다. 하지만 경제학자 입장에서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번 위기로 시장 체제가 잘 작동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게 됐다. 돌이켜 보면 10년마다 위기가 왔다. 일본의 거품 붕괴, 1987년의 증시 대폭락,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 닷컴 버블, 현재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렇다.”

행동경제학자의 관점에서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나.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 첫째는 세계가 극도로 복잡해졌다는 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기지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30년 만기에, 고정금리로 대출조건이 간단했다. 그런데 모기지 상품이 너무 많고 복잡해져서 티저 금리(대출의 첫 1~2년간만 적용되는 낮은 금리) 같은 것도 생기고, 모기지 브로커가 등장해서 재대출해주는 것도 생기고…. 그러니 인간들이 이것을 처리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둘째는 고도로 전문화된 금융의 문제점이다. 대출의 증권화 기법 등이 발달하면서, 금융회사들도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물론 세계화 덕분에 한국과 같은 나라의 번영도 가능해졌고, 나 역시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 위기를 계기로 세계화의 다운사이징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위기의 발단은 미국의 부동산대출이지만, 저 멀리 아이슬란드 경제까지 망가졌다. 불과 2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각국에서 위기 재발 방지를 위한 금융부문의 규제 개선책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방향을 제시한다면.
“더 나은 공시(公示) 시스템이 필요하다. 충분한 공시가 이뤄져 대형 금융회사들이 지나친 시스템적 리스크를 떠안고 있지 않은지, 레버리지(대출)가 얼마나 되는지 등을 투명하게 공개해서 회사 경영진조차 리스크(위험) 정도를 모르는 상황이 되풀이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또 지나치게 많은 임금과 보너스 등 보상 체계를 규제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는데, 내 생각엔 보상 금액의 수준을 규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대신 보상 구조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가령 지금은 회사가 오르막길을 달릴 때는 엄청난 보너스를 챙겨가지만, 회사가 내리막길을 갈 때 그걸 도로 토해내는 구조는 아니다. 그래서 CEO나 금융인들이 엄청난 리스크도 감수하려는 심리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위쪽, 아래쪽 다 책임지게 만드는 구조를 만들면 너무 많은 리스크까지 감수하려는 심리를 제어할 수 있다.”

왜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 많은 정책 결정자들이 그토록 넛지에 관심을 가질까.
“넛지는 적은 비용으로 효과를 내는 정책이다. 위기의 재발을 막으려면 이제 인간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캐스 선스타인과 오바마 대통령, 벤 버냉키, 래리 서머스 모두 한 단어를 공유한다. 바로 ‘실용주의’다. 오바마 대통령은 결코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효율성을 추구한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재임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버냉키 역시 탈정치적인 인물이다. 이 책을 쓸 때 중도의 공공 정책을 추구했다. 좌우를 떠나 정책 결정자들이 이 책이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 리처드 세일러 Richard Thaler
시카고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