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스튜디오의 사상 첫 흑인 수퍼 히어로물 ‘블랙팬서’. <사진 : 마블>

2017년 열렸던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했다. 최고 영예로 꼽히는 작품상의 주인공이 잘못 호명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제대로 찾아간 트로피의 주인이 동성애자 흑인 소년의 고단한 성장기를 담은 독립영화, ‘문라이트’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문라이트가 흑인의 삶을 주제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최초의 작품(노예 12년)은 아니지만, 감독을 비롯해 모든 출연진이 흑인 배우인 영화 중에선 최초다. 소셜미디어에서 ‘오스카(아카데미 시상식의 또 다른 이름)는 너무 하얗다(#Oscars So White)’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질 만큼 백인 위주의 시상식이었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문라이트의 수상은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문라이트를 시작으로 흑인을 앞세운 ‘블랙필름’ 성장세가 가속화됐다. 인종차별을 신선한 방식으로 풀어낸 호러영화 ‘겟 아웃’이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고, 흑인 여성 4명의 유쾌한 여행 이야기를 그린 ‘걸즈 트립’도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문라이트’ ‘겟 아웃’ ‘걸즈 트립’ 모두 저예산으로 어렵게 탄생한 영화들이다. 최근 개봉한 마블 스튜디오의 최초 흑인 영웅 이야기 ‘블랙팬서’는 블랙필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그것을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메이저 블록버스터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역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다.

블랙팬서는 아프리카 가상의 나라 ‘와칸다’의 지도자를 말한다. 와칸다는 대외적으로는 세계 최빈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최고의 금속물질인 ‘비브라늄’이 다량 매장돼 있는, 고도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국가다.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이 불안정한 정치체제, 빈곤과 싸울 때에도 와칸다는 부유함을 숨겨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아왔다. 폭파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티찰라는 비브라늄을 지키기 위해 와칸다의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전통과 아프리카 대륙 출신인 다른 흑인들의 비참한 삶을 외면하는 데 대한 양심의 가책 사이에서 번민한다. 그러던 와중 와칸다의 왕좌와 비브라늄을 킬몽거에게 빼앗기고, 이를 다시 되찾기 위해 블랙팬서 수트를 입고 전투에 나선다.

미국 박스오피스 집계 사이트 모조(Mojo)에 따르면, 블랙팬서는 지난 5일(현지시각) 기준 전 세계 누적 수익 9억982만달러(약 9744억원)의 수익을 기록 중이다. 북미에서만 5억642만달러(약 5423억원)를 벌어들여 지난해 개봉한 ‘미녀와 야수’를 제치고 역대 흥행 9위로 올라섰다. 일본에선 지난 1일에야 개봉했고, 중국에선 9일부터 상영이 시작된 점을 고려하면 수익 1조원 돌파는 가뿐할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커스 리드(Americus Reed)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와 헨리 보이드(Henry Boyd)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 블랙팬서 비하인드 스토리를 책으로 내기 위해 마블이 선임한 작가 제시 홀랜드(Jesse Holland)는 블랙팬서가 어떻게 블랙필름의 한계를 깨고 전 세계적으로 흥행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 분석했다.



‘블랙팬서’ 주연배우들. <사진 : 마블>

흥행요인 1 | 문화적 시대정신의 발현

이들은 블랙팬서가 ‘문화적 시대정신(cul-tural zeitgeist)’과 맞아떨어졌다는 점이 주효했다고 봤다. 최근 미국은 백인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16년 기준 미국 인구를 인종별로 나눠보면, 백인은 76.9%, 유색인종은 23.1%로 나타났다. 특히 흑인이 13.3%를 차지해 유색인종 중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 미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는 2050년이 되면 유색인종 비율이 53%로 높아져 백인(47%)을 앞지를 것으로 보고 있다.

유색인종 인구는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백인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UCLA의 ‘할리우드 다양성 보고서 2018’에 따르면, 2016년 영화의 주연배우를 맡은 백인과 유색인종의 비율은 각각 86.1%, 13.9%였다. 5년 전인 2011년(백인 89.5%, 유색인종 10.5%)에 비해 크게 나아지지 않은 셈이다.

주연 배우 자리를 온통 백인들이 차지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유색인종 인구의 증가와 함께 더욱 힘을 얻기 시작했다. 주연배우는 주로 영웅 등 선한 역할을 맡는 것과 달리, 유색인종은 사악한 악당, 테러리스트 등 부정적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특히 흑인의 경우 게으르고 아둔하며, 야만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미국 터프츠대의 ‘어린이 TV 프로젝트’ 팀에 따르면, 이를 보고 자라는 어린이들은 인종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갖게 될 확률이 높고 이는 인종차별 해소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스크린 내 인종차별에 대한 경고음은 점차 커졌지만 유색인종 이야기, 또는 이들이 주연을 맡을 경우 관객들이 외면한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흑인이 수퍼 히어로로 등장하는 블랙팬서가 성공함으로써 유색인종 주연 영화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이 입증됐다. 홀랜드는 “블랙팬서는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대부분 흑인인 수퍼히어로 영화가 미국 주류 감성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부순 것”이라고 평가했다.


흥행요인 2 | 한계 벗어난 女 캐릭터

블랙팬서는 기존 블랙필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인종평등과 함께 양성평등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블랙팬서 내 여성 캐릭터는 기존 수퍼 히어로물처럼 보호를 받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능력 있고 자주적이다. 주인공 티찰라의 옛 연인 나키아 역을 맡은 루피타 뇽(Lupita Nyong’o)은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일종의 비밀 요원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라며 “와칸다 바깥으로 나가 정보를 취합해 와칸다로 보내는 역할인데, 강인하고 독창적인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극 중 티찰라와의 관계 역시 나키아가 적극적으로 리드한다.

이 외에도 티찰라의 여동생 슈리는 와칸다의 첨단기술 개발을 책임지는 천재 과학자다. 티찰라의 최정예 호위부대 ‘도라 밀라제’는 모두 여성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를 이끄는 수장 역시 여장군 오코예다. 리드 교수는 최근 미국에서 시작된 성범죄 공개 운동인 ‘미투(Me too·나도 성범죄를 당했다) 운동’을 언급하며 “지금은 그동안 소외돼 왔던 다양한 계층들과 평등하게 권한을 나눠가져야 할 시기”라며 “(평등에 대한) 영감을 주고, (모든 계층이) 연대하도록 만들고, (각자의) 정체성을 찾도록 하는 (블랙팬서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고 말했다.


흥행요인 3 | 美 정치적 반감 극대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이민정책을 펼치며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을 쏟아내는 현 상황 또한 블랙팬서의 흥행에 일조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이민정책 관련 회의에서 아이티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향해 ‘거지소굴(shithole)’이라고 욕설을 퍼부은 것이 알려져 곤욕을 치렀다. 파문이 일자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AP통신과 여론조사기관 NORC 공공문제연구센터가 지난 2월 미국 내 성인 1337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57%가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답했다. 특히 흑인들은 10명 중 8명이 이 같은 의견을 보였다.

티찰라가 영화 마지막 국제연합(UN) 회의에 참석해 전 세계 흑인들과 연대하겠다며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세운다”고 한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당시 멕시코인들을 ‘강간범’ ‘범죄자’ 등으로 부르며 이들의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한 국경 장벽을 세우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장벽 건설에 필요한 비용까지 멕시코 측에 부담할 것을 요구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지난해 미국 여론조사기관 라스무센과 퓨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6%, 멕시코인의 94%가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에 반대하고 있다. ‘타임’은 “블랙팬서의 존재는 현 정부에 의해 야기된 문화·정치적 퇴행에 맞선 또 다른 저항의 형태”라고 평가했다.



‘블랙팬서’의 악역 킬몽거. <사진 : 마블>

흥행요인 4 | 미워할 수 없는 악당, 킬몽거

선과 악, 영웅과 악당으로 대변되는 단순한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악역에게마저도 공감을 이끌어낸 점 또한 블랙팬서의 흥행 요인 중 하나다. 홀랜드는 “다른 할리우드 영화들과 달리, 블랙팬서의 악당 킬몽거는 일차원적인 캐릭터가 아닌 복잡하고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평가했다. 킬몽거는 미국 오클랜드의 흑인들 사이에서 차별을 겪으며 자라난 데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따라 해외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비밀요원으로 훈련받았다. 전 세계 흑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무기를 활용한 전쟁뿐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은 비폭력 온건파인 티찰라와 급진파인 킬몽거의 갈등을 보며 미국 흑인 인권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과 말콤X를 떠올린다. 티찰라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비폭력주의자 간디의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 킹의 모습을 꼭 닮았고, 킬몽거는 아버지의 살해, 생활고, 학교에서의 인종차별 등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 말콤X와 겹친다. 마틴 루터 킹이 비폭력 평화시위를 통해 흑백화합을 추구했고, 말콤X는 백인들이 저지른 죄악을 단죄하기 위한 비타협적 혁명을 추구한 점 또한 비슷하다. 마블은 티찰라와 킬몽거 중 누군가의 편을 들어줄 수 없도록 관객을 유도한다. 마블을 포함한 할리우드 수퍼 히어로물의 상투적인 악당에서 깨끗이 벗어난 것이다.

또 킬몽거는 아프리카인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홀랜드는 “킬몽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대변한다”며 “블랙팬서 속 와칸다는 ‘가진 자’이고 나머지 모두는 ‘가지지 못한 자’다. 킬몽거는 아프리카인들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책임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아프리카인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갈등의 골은 깊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자신들이 인종 차별에 맞서 싸울 때 아프리카인들은 이를 방관한다고 느끼고 있다. 또 미국 내 흑인 처우 개선을 위해 아프리카 국가들이 함께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인들 역시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벌어지는 정쟁과 빈곤 등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더욱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한다.

리드 교수는 블랙팬서가 관객들의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했다고 봤다. 그는 “관객들에게 정체성 등에 대한 문제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이를 재미있는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는 스토리는 놀라울 정도로 강한 마케팅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plus point

1960년대 흑인인권단체 ‘블랙팬서당’에서 영감


블랙팬서당 당원들의 모습. <사진 : 플리커>

블랙팬서는 실제 존재했던 미국 급진주의 흑인인권단체 ‘블랙팬서당(BPP)’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BPP는 오클랜드 메리트대의 학생이었던 휴이 뉴튼(Huey Newton)과 바비 실(Bobby Seale)이 1966년 창당했다.

블랙팬서당은 흑인의 완전고용, 경제적 착취에 대한 회복, 좋은 주거·교육환경, 경찰의 폭력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10가지 강령을 제정했다. 흑인들에게 무료 아침식사, 열린 학교, 의료서비스 등을 제공했고, 경찰의 괴롭힘으로부터 흑인들을 보호하겠다며 검은 베레모를 착용하고 총기로 무장한 채 흑인 거주지역을 순찰해 큰 호응을 얻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공공기관 등을 공격하는 등 경찰과 본격적으로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미국 연방수사국은 BPP를 두고 “국내 안보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라고 선포했다. BPP 당원들은 폭력·고문·살인·암살 등 혐의로 잇따라 구속, 또는 사망했고 결국 1982년 완전히 해체됐다.

블랙팬서 만화 원작자이자 마블 코믹스 명예회장인 스탠 리(Stan Lee)가 처음부터 BPP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원래 만화 제목은 ‘콜 타이거(Coal Tiger·석탄 호랑이)’였지만, 리가 읽었던 소설 속 블랙팬서에서 영감을 얻어 제목을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블랙팬서 제작진은 원작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BPP의 의미를 영화 속에 새겼다. 영화 속 첫 장면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시작한다. 이곳은 BPP가 처음 결성된 곳이다. 또 영화 속 와칸다의 모토 ‘공격받지 않는 한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는 BPP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plus point

할리우드 영화 인기 촬영지로 급부상한 한국


부산 광안대교를 달리고 있는 주인공 티찰라. <사진 : 마블>

블랙팬서를 보다 보면 관객들이 다같이 탄성을 지르는 포인트가 있다. 바로 티찰라와 그의 옛 연인 나키아, 오코예 장군이 한국 부산 광안리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마블은 광안리 해변에서 자동차 150여대와 700명 이상이 참여한 자동차 추격 장면을 촬영했다.

마린시티와 광안대교, 자갈치 시장이 담겼고, 한국계 미국인 배우 알렉시스 리(Alexis Rhee)가 특별 출연해 나키아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눈다. 이들의 어설픈 한국어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린다.

라이언 쿠글러(Ryan Coogler) 블랙팬서 감독은 “부산은 현대와 전통 건축물이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며 “부산은 블랙팬서의 촬영지로 완벽하다”고 극찬했다.

할리우드 감독들은 공략하고 싶은 시장을 골라 현지에서 영화를 촬영하거나, 현지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한때는 중국과 일본이 유망시장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인기가 높은 한국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15년 개봉한 마블 영화 ‘어벤저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서울 마포대교와 상암동 일대에서 촬영됐고, 한국 배우 수현이 출연했다.

이 외에도 2012년 개봉한 제레미 레너(Jeremy Renner) 주연의 ‘본 레거시’ 초반부에는 서울 강남과 지하철이 등장하며, 2014년 개봉한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 주연의 ‘콜로설’ 또한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괴수라는 설정을 통해 한국에서 영화의 상당 부분을 촬영했다. 배우 배두나가 출연한 미국 드라마 ‘센스 8’에도 서울 남산타워, 청계천 등이 등장했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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