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의 무역정책 설계자로 꼽히는 피터 나바로 국장. <사진 : 블룸버그>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정책 설계자로 꼽히는 피터 나바로 국장. <사진 : 블룸버그>

“미국은 거의 모든 무역 거래에서 지고 있다. 우리 친구와 적들은 여러 해 동안 미국을 이용해 먹었다. 그 때문에 미국 철강과 알루미늄 산업이 죽었다. 미안하지만, 이제는 바뀔 때다. 위대한 미국을 재건해야 한다.”

3월 1일 수입산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대해 각각 25%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발표로 세계 경제가 혼돈에 빠진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3월 4일 쏘아 올린 트위트는 세계를 상대로 한 미국의 무역 전쟁 선포로 들린다.

중국, EU(유럽연합)는 물론 여당인 공화당 하원의원 107명이 반대 서안을 발표하는 등 거센 반발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가 무역에서 수십억달러를 잃고 있는 한 무역 전쟁은 미국에 좋은 것이다. 우리는 승리할 것”(3월 6일)이라며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켈리 실장 이후 입지 축소됐다가 ‘기사회생’

“백악관 웨스트 윙 복도를 서성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내셔널리스트, 강경 보호무역주의자들이 마침내 트럼프의 귀를 잡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유력 언론들은 수입산 철강,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 부과 결정을 계기로 백악관의 강경 매파들이 대외 무역 정책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보도하고 있다.

시선은 보호무역주의 신봉자인 윌버 로스 상무장관, 피터 나바로(Peter Kent Navarro·69) 백악관 무역과 제조업 정책 국장에게 집중되고 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두 사람이 공동 집필한 트럼프 대통령 후보 정책 백서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특히 “‘트럼프 대통령 후보의 무역 정책 설계자(architect)’인 나바로 국장이 웨스트 윙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의 승자가 됐고 최고의 경제 실세로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관측은 게리 콘 백악관 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3월 7일 사표를 던지면서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콘 위원장이 사퇴라는 배수진을 치고 저항했지만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백악관 참모들의 익명 증언을 인용, 보도했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사장 출신인 콘 위원장은 월스트리트와 기업의 신망을 받던 백악관 경제 참모였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대적인 법인세 감면 법안 통과, 1조5000억달러 인프라 투자 등을 주도했다. 트럼프 행정부 내부의 온건파,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글로벌리스트들의 좌장 역할을 하면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환태평양경제동반자 협정(TPP) 탈퇴,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개정 등 트럼프의 강경한 대선 공약 실행에 제동을 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나바로 국장이 최근 콘 경제위원회 위원장의 강력한 후임자로 떠오르자 “나바로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설계하고 구축한 다자간 무역 체제에서 미국을 탈퇴시킬지 걱정이다”(사이먼 존슨 MIT 경영대학원 교수) 등 그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나바로 국장은 2016년 12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직후 신설된 백악관 국가무역위원회(NTC) 초대 위원장으로 워싱턴 정가에 데뷔했다.


트럼프 사위 추천으로 ‘발탁’

하지만 화려한 등장과 달리 최근까지 정책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특히 작년 7월 ‘백악관 군기반장’ 존 켈리 비서실장 취임 이후 입지가 급격히 축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위계 질서’를 강조하는 켈리 실장이 나바로 국장 등 고위 참모들과 자주 충돌하자 국가무역위원회를 콘 위원장이 지휘하는 경제위원회 산하로 이관하고 지위도 무역과 제조업 정책 국장으로 강등시켰다. 나아가 백악관 주요 회의 참석이 금지되고 모든 이메일과 일정을 콘 위원장에게 보고하는 신세가 됐다고 백악관 인사들이 전했다. 중국 전문가인 나바로 국장은 작년 가을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에도 제외됐다.

나바로 국장은 그러나 2월 21일 트럼프 대통령과 독대를 통해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미 행정부의 무역 정책이 왜 더 공격적이지 않느냐’고 묻는 트럼프 대통령의 질문을 받자 일련의 강경 무역 정책 플랜을 제시, 대통령의 마음을 다시 잡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독대 직후 켈리 비서실장을 불러 무역과 제조업 정책국을 경제위원회에서 분리시키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캘리포니아대 어바인 캠퍼스(UC Irvine) 교수 출신인 나바로 국장은 13권의 저서와 70여편의 논문을 발표한 경제학자이자 샌디에이고 시장(무소속), 하원의원 선거(민주당) 등 선거에 3차례 출마한 ‘폴리페서’다.

하지만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주류 경제학자들과 달리 관세 등 보호 무역을 주장, 비주류 경제학자로 분류된다.

민주당 소속으로 선거에도 나간 그가 트럼프 캠프에 합류한 계기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시너 백악관 고문의 추천 덕분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인터넷으로 중국 전문가를 검색하던 쿠시너 고문이 아마존에서 나바로 국장의 저서 ‘중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날(Death by China·2012)’ 등을 읽고 그와 면담한 뒤 직접 천거했다고 한다.

“중국·독일 등의 환율 조작과 불공정 무역, 불평등한 국제 협약 때문에 미국 국민들이 일자리를 잃고 기업들이 파산하고 있다”며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던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과 생각이 똑같은 경제 전문가를 찾았다며 기뻐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 후보 선거 보좌관 출신인 스티븐 무어 헤리티지 재단 펠로는 “대외 무역 정책에 관한 한 나바로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한 목소리를 내는 분신과 같다”고 말했다.

나바로 국장의 부상과 함께 북미자유무역협정, 세계무역기구(WTO) 등에 대한 미국의 정책 노선은 물론 한·미자유무역협정 개정 협상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더 강경해질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이는 11월 예정된 중간 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쇠락한 제조업 기업이 집중된 미국 동부의 ‘러스트 벨트’ 등 공화당의 표밭 다지기에 들어가기 위한 사전작업이란 분석도 있다.


Plus Point

중국 베스트셀러 저자

나바로 국장이 쓴 중국 관련 저서 ‘웅크린 호랑이’. <사진 : 교보문고>
나바로 국장이 쓴 중국 관련 저서 ‘웅크린 호랑이’. <사진 : 교보문고>

나바로 국장은 1949년 밴드의 색소폰과 클라리넷 연주자인 알 나바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 플로리다 삭스핍스 백화점 비서였던 어머니를 따라 플로리다에서 살았고 10대 때는 주로 뉴햄프셔주에서 보냈다.

1972년 터프츠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공공정책학 석사를 받은 뒤 1986년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직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태국에서 3년간 체류했다.

1970년대 이후 미국 에너지청과 민간 에너지 기업, 하버드대에서 에너지와 환경정책 분석가로 일했다. 1989년부터 캘리포니아대 어바인 캠퍼스의 경제와 공공정책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날’ ‘웅크린 호랑이: 중국 군사주의가 의미하는 것(2015년)’ 등을 통해 중국 관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제자들이 실직하는 모습을 보면서 중국에 대한 문제 의식을 키웠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 후보의 정책 백서를 통해 “한·미FTA는 미국에 손실 말고는 가져온 게 없는 협상”이라며 한국 상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 부과 등을 주장했다. 지난 1월 한국산 세탁기 등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건축가인 아내 레슬리 르봉, 아들 알렉스 나바로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라구나 비치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