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실을 폭로하는 ‘미투 운동’이 기업 등 민간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종합가구업체 한샘이 직원 성폭력 사건의 그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 신입 여직원 A씨는 지난해 11월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회사 교육 담당자가 회식 뒤 자신을 모텔로 불러내 성폭행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이 사건을 회사에 보고했지만 문제를 바로잡아야 할 인사팀장은 A씨에게 사건 축소를 위해 허위 진술을 강요했고, 나아가 성폭행까지 시도했다고 폭로했다. 논란이 불거진 뒤 최양하 한샘 회장은 직접 임직원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여론은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소비자들은 한샘 불매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를 의식한 일부 홈쇼핑 업체들은 한샘 제품 판매 방송의 방영을 연기 또는 중단했다.

사건 발생 이후 약 5개월이 지났지만 그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6일 한샘은 1분기 영업이익이 개별 기준 178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08억원)보다 56.3% 감소했다고 공시했다. 실거주 목적의 주택 매매 거래량이 줄면서 인테리어 수요가 감소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지만, 성폭력 사건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경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한샘은 올해 1분기 홈쇼핑, 온라인 매출이 큰 타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5개월 새 한샘 주가는 25% 가까이 떨어졌고, 4조원에 육박했던 시가총액도 1조원가량 증발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한국에 상륙했다. 성폭력에 노출됐던 아픈 과거를 공개한다는 점에서 미국과 다를 바 없지만, 그 범위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미국은 연예계·문화계 등을 중심으로 미투 운동이 발생한 반면 한국에서는 공인이 아닌 민간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들은 회사 내 성폭력이 발생하면 숨기기에 급급하다. 바깥에 알려질 경우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돼 주가 하락 등 실질적 수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제니퍼 프리드(Jennifer Freyd) 오리건대 심리학과 교수는 기업이 성폭력 발생 사실을 숨길수록 피해자는 더 큰 심리적 타격을 입을 수 있고, 기업 이미지는 실추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기업이 먼저 성폭력 발생 사실을 인정하고 깨끗하게 사과한다면 오히려 기업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프리드 교수에 따르면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낯선 사람에게 당하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그 이유는 ‘배신’에 있다. 인간은 살면서 주변에 있는 다양한 존재에게 의지하는데, 직장 동료나 상사도 그 대상이다. 믿고 있던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한다면 성폭력 자체의 상처에 배신감까지 더해진다. 미국 성폭력 방지 비영리단체 ‘강간·학대·근친상간 전국 네트워크(RAINN)’에 따르면, 직장 동료·상사 등 지인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 중 79%는 심리적 문제를 겪고 있다고 답했다. 낯선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 중 67%가 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고 답한 것과 비교하면 12%포인트 높다.

피해자들의 심리적 충격을 더욱 키우는 것은 ‘배신에 눈감기(Betrayal blindness)’ 행위다. 피해자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배신에 눈을 감는다. 배신이라는 엄청난 충격을 오롯이 감내하느니 차라리 이를 외면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체념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목격자 역시 자신의 주변에서 배신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침묵한다. 프리드 교수는 “배신에 눈감기 현상은 피해자에게 성폭력 발생 사실 자체보다 더 큰 심리적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며 “피해자는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자해, 약물 남용 등을 겪는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기업으로부터 ‘제도적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피해자가 사측에 성폭력 발생 사실을 알릴 경우 기업이 피해자를 보호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사건을 축소하는 것이다. 프리드 교수에 따르면 제도적 배신을 저지르는 기업들 중에서도 특히 악랄한 곳은 ‘부정·공격, 가해자와 피해자의 뒤바뀜(Deny·Attack and Reverse Victim and Offender)’ 행태를 보인다. 즉 ‘우리 기업 내에서 성폭력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며 ‘너도 잘못이 있다’고 피해자를 공격하고,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오히려 피해자’라며 가해자를 감싸는 것이다.

프리드 교수는 “성폭력을 당한 이들 중 40%가 제도적 배신을 경험했다”며 “미 재향군인회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군대에서 성폭력을 당한 뒤 제도적 배신을 느낀 이들 중 PTSD와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더 많았고, 자살 시도 확률도 높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도적 배신은 기업에도 좋지 않다”며 “제도적 배신을 당하거나 목격한 직원들의 병가와 결근이 잦아지고 일부 직원들은 아예 회사를 떠날 수도 있는데, 이들은 밖으로 나가 기업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직장 동료상사 등 지인에게 성폭력을 당한 이들은 큰 심리적 피해를 받을 수 있다.


직원들, 동료 피해에 귀기울여야

그렇다면 기업은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프리드 교수는 “기업이 제도적 용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즉 △성폭력 관련 교육 이수 △성폭력 관련 정기적인 익명 설문조사 실시 △내부 고발자 보호 등 성폭력 대처 매뉴얼을 제도적으로 마련해 시행하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프리드 교수는 “직원들은 동료의 피해에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고 귀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며 “기업은 직원 개인의 잘못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직접 사과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성폭력 발생 사실이 알려졌을 경우 맞닥뜨려야 하는 부정적 여론이다. 프리드 교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해 정직하게 대처하는 기업은 오히려 긍정적 반응을 얻을 수 있다”며 오리건대 사례를 소개했다. 2014년 한 여성은 16년 전인 1998년, 오리건대 풋볼 선수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에드워드 레이(Edward Ray) 오리건대 총장은 철저한 수사를 약속하고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사건 관련 당사자들에게 모두 개별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프리드 교수는 “레이 총장은 사과 편지를 작성하고 성폭력 컨설턴트를 고용해 재발 방지책을 마련했다”며 “레이 총장의 이 같은 대처는 이후 오리건대에 엄청난 홍보 효과를 가져다 줬다”고 말했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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