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18 가을·겨울 파리 패션위크 모습. 전문가들은 침체된 한국 패션 업계가 성장을 이어 가려면 반드시 유럽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18 가을·겨울 파리 패션위크 모습. 전문가들은 침체된 한국 패션 업계가 성장을 이어 가려면 반드시 유럽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영국 런던에 있는 ‘톱숍(Topshop)’은 유럽 내 손꼽히는 패션 쇼핑 명소다. 젊은층을 겨냥한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뿐 아니라 게스·캘빈클라인·타미힐피거 등 굵직한 패션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톱숍에서 벌어지는 브랜드 간 경쟁은 유럽 패션 쇼핑 시장의 축소판으로 불릴 정도다.

이 치열한 글로벌 브랜드의 경쟁판에 당당히 들어선 브랜드가 있다. 한국인 디자이너 정예슬(29)씨가 만든 ‘오아이오아이(oioi)’다. 오아이오아이는 온라인 쇼핑몰 인기에 힘입어 2016년 톱숍 입점에 성공했다. 2011년 창업 이후 2015년 매출 10억원을 돌파한 데 이어 2018년 매출 100억원을 달성했다.

오아이오아이의 시작은 블로그였다. 정예슬 대표는 오아이오아이를 창업하기 전 자신이 입고 싶던 옷과 모자를 만들어 블로그에 사진을 올려 팔기 시작했다. 정 대표가 영국 런던 유학 때 만난 여러 예술가와 친구들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확신만 있으면 밀고나가는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영감대로 옷을 만들었는데, 톡톡 튀는 디자인과 특유의 자유로움이 사람들에게 통했다. 오아이오아이 제품은 캐주얼이나 오피스룩 등 특정 패션 분야에 속하지 않는다. 정 대표는 시즌별로 구상한 테마를 다양한 스타일로 표현한다. 패션 테마는 계속 변하지만 사업 철학은 확고하다. 매 시즌 디자인 재활용 없이 새로움을 선보인다는 원칙이다.


톡톡 튀는 디자인과 특유의 자유로움으로 인기를 얻어 영국 시장에 진출한 패션 브랜드 ‘오아이오아이’. 사진 오아이오아이
톡톡 튀는 디자인과 특유의 자유로움으로 인기를 얻어 영국 시장에 진출한 패션 브랜드 ‘오아이오아이’. 사진 오아이오아이

유럽 시장, 명품·SPA 시장으로 양분

정 대표에 따르면 유럽 패션 시장은 고가의 명품과 저가 SPA 시장으로 양분돼 있다. 명품 살 돈이 없으면 저렴한 SPA 브랜드 옷을 선택하는 구조다. 정 대표는 “디자이너 이름을 건 의류를 명품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면 유럽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를 만들 수 있다”며 “온라인 플랫폼에서 신생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한국 디자이너들이 주시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글로벌 패션 시장의 중심지인 유럽을 제패하고 미국과 중국·일본을 차례차례 공략해나갈 계획이다. 세계 시장에 K-패션(한국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로 우뚝 서는 것이 목표다.

오아이오아이와 같은 디자이너 브랜드뿐 아니라 국내 패션 업계의 해외 진출은 활발하다. 해외 진출에 적극적인 곳 중 하나가 삼성물산 패션부문이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남성복 브랜드 준지(JUUN.J)로 파리를 공략하고 여성복 브랜드 구호(KUHO)로 뉴욕 진출에 성공했다.

구호는 2016년 9월 뉴욕에 첫 입성해 노드스트롬, 레인크로러드, 싱가포르 클럽21백화점을 비롯해 캐나다 온라인 편집숍 센스와 계약을 성사시켰다.

남성복 브랜드 준지는 2007년 파리 컬렉션에 첫 진출한 이후 10년 동안 해외 시장 공략에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준지는 2015년 1월 한국 브랜드 최초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세계 최대 남성복 박람회인 ‘피티 워모(Pitti Uomo)’에 게스트 디자이너 자격으로 참석했다. 준지는 현재 뉴욕·런던·파리·밀라노·홍콩 등 30여 개국 100여 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영국 해로드백화점에 팝업 매장을 열어 글로벌 사업 확장에 날개를 달았다. 해로드백화점은 글로벌 프리미엄 브랜드만을 입점시키는 곳으로 유명하다.

현대백화점그룹의 패션 업체 한섬도 프랑스와 중국을 중심으로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섬은 2014년 프랑스 파리의 대표적 쇼핑 명소인 마레 지구에 의류 편집매장 ‘톰그레이하운드 파리’를 열며 해외 진출을 시작했다. 톰그레이하운드 파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백화점 갤러리 라파예트 바이어들도 찾았다.

LF도 헤지스를 내세워 글로벌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캐주얼 의류 브랜드인 헤지스는 2017년 7월 프랑스 파리의 유명 편집숍 ‘콜레트(Colette)’에 입점해 쇼윈도 전시를 하며 유럽에 진출했다. 콜레트는 1997년 개장 이후 매 시즌 세계 패션 트렌드를 선도하는 제품을 꾸준히 선보이며 미국의 ‘오프닝세리머니’, 이탈리아 ‘텐코르소코모(10 CorsoComo)’와 함께 세계 3대 편집숍 중 하나로 꼽힌다.

이처럼 패션 업계가 유럽 시장에 주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유럽은 세계적인 패션 컬렉션이 개최되며 각국 패션 관계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중요한 시장이라고 입을 모은다. 유럽 시장을 통해 브랜드로서 경쟁력을 인정받고 전 세계 패션 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침체된 한국 패션 시장을 넘어 성장을 이어 가려면 반드시 유럽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연주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국장은 “국내 패션 산업은 급격한 패션 산업 환경·소비행동 변화로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다”며 “침체된 국내 패션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패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될 수 있는 새로운 패션 브랜드를 발굴·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 국장은 또 “현재 한국 문화에 대한 글로벌 시장에서의 긍정적 반응은 앞으로 한국이 다양한 문화와 융합을 통해 세계적인 ‘한국의 미(Korea style)’를 개발해 해외 패션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글로벌 패션 시장은 2014년 1조3000억달러에서 올해 1조7000억달러로 25.4%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패션협회 관계자는 “국내 유통 구조와 구매력 한계로 글로벌 패션 시장 진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며 “국내 패션 기업은 나라별 패션 시장 특성을 철저히 분석해 진출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은 ‘편안함’·남성은 ‘꾸안꾸’ 원해

유럽 패션 시장엔 어떤 트렌드가 나타나고 있을까. 크게 여성복·남성복·온라인 시장으로 나눠 살펴봤다.

최근 유럽 여성복 시장에서 나타난 주된 트렌드는 ‘편안함’이다.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애슬레저 룩(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운동복)이 일상복이 되면서 애슬레저 의류 판매가 늘었다. 슈트 등 포멀웨어 판매는 줄어든 반면 레깅스처럼 편안한 아이템 판매가 늘었다. 패션 업계는 향후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독일에서는 여성들이 직장에서 슈트 대신 청바지를 주로 입기 시작하면서 프리미엄 진 시장이 커졌다. 영국에서는 일상운동으로서 수영 인기가 높아지면서 많은 여성이 내구성과 기능성을 갖춘 수영복을 찾고 있다. 2017년 크게 성장한 브랜드는 영국 수영복 브랜드 ‘스피도(Speedo)’다.

고급 패션 시장에서는 여성 디자이너 의류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영국 시장에서 성공한 오아이오아이처럼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힌 디자이너 의류 브랜드가 크게 성장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여성들과 달리 유럽 남성들은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스타일을 추구하는 추세다. 영국 남성들에게 외모와 스타일이 정체성을 나타내는 요소로 부상하면서 ‘스타일리시하면서도 너무 많은 노력을 들여 차려입은 것처럼 보이진 않는 패션’이 주목받고 있다. 예컨대 ‘항공점퍼’ 스타일인 ‘MA-1 스타일 봄버 재킷’과 더플코트 등을 어두운 그린 또는 회색 진과 맞춰 입는 것이다.

저렴한 진 제품 판매에서 ‘뉴 룩(New Look)’과 ‘부후(Boohoo)’ 같은 SPA 브랜드가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들 브랜드는 찢어지고 해진 청바지 디자인, 디테일한 장식 등에 중점을 뒀다. 독일 남성 소비자 역시 스타일리시한 패션을 선호해 슬림핏 등 옷맵시에 신경 쓴 패션이 주목받았다.

온라인 쇼핑은 영국에서 가장 활성화했다. 리테일 시장 조사·컨설팅 전문업체 펑 글로벌 리테일 앤드 테크놀로지에 따르면, 아소스(ASOS), 부후, 미스가이디드(Miss

guided) 등 영국 온라인 패션 업체들이 ‘울트라 패스트패션(Ultra Fast Fashion·초고속 패션)’을 무기로 글로벌 SPA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업체는 공급망을 간소화하고 주요 시장에 근접한 곳에 생산거점을 마련해 소비자의 요구를 빠르게 맞추고 있다. 이들은 주로 16~24세 젊은층을 타깃으로 세련되고 저렴한 옷을 선보이며,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LVMH(루이뷔통모에헤네시)그룹이 2016년에 만든 온라인 쇼핑몰 ‘24세브르닷컴(24Sevres.com)’을 통해 명품의 온라인 소비도 늘고 있다. 24세브르닷컴은 LVMH그룹 소유의 백화점 르봉마르셰의 온라인 사이트 격으로 루이뷔통·디오르·펜디 등 20여 개 자체 브랜드를 포함해 총 150개가 넘는 럭셔리 브랜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패션 업계는 24세브르닷컴이 고급 브랜드뿐 아니라 나이키 등 비고급 브랜드도 취급한다는 점에서 ‘네타포르테’ ‘마이테레사’ ‘매치스패션’ 등 유럽의 기존 온라인 쇼핑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2세대 온라인 쇼핑몰로 부상했다고 평가한다.

패션 업계에 따르면 올해 유럽 패션 시장의 핵심 키워드는 ‘울트라 패스트패션’과 ‘지속 가능한 패션’ ‘역사를 지닌 브랜드’다.

디자인에서 판매까지 걸리는 시간을 리드타임(lead time)이라고 하는데,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리드타임이 평균 5주 정도라면 울트라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은 이를 2주로 줄였다. H&M, 자라, 유니클로 등 기존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이 매장을 늘리면서 양적 성장에 집중한 것과 달리 아소스, 부흐, 미스가이디드 등 울트라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은 온라인 판매를 중심으로 공급망을 간소화하고 리드타임을 획기적으로 줄여 소비자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매주 1000종 이상의 신상품을 출시해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혔다.

그러나 패스트패션과 마찬가지로 울트라 패스트패션도 환경 파괴 이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너무 많은 옷이 생산되고 버려지면서 환경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한편에서는 ‘지속 가능한 패션’을 추구하는 브랜드가 늘고 있다.


아디다스가 해양 플라스틱 폐기물을 재활용해 만든 ‘울트라 부스트 팔리 러닝슈즈’. 사진 아디다스
아디다스가 해양 플라스틱 폐기물을 재활용해 만든 ‘울트라 부스트 팔리 러닝슈즈’. 사진 아디다스

아디다스, 100% 재활용 원료 대체 선언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 오염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고, 영국 등 유럽에서 확산되는 플라스틱 사용 규제 움직임에 맞춰 재활용 폴리에스터를 사용하는 스포츠 의류 브랜드가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 아디다스는 향후 6년 내 신발과 의류 제품에 활용되는 폴리에스터를 재활용 폴리에스터로 완전히 대체하겠다고 밝혔다. 아디다스가 해양 환경 보호 단체 팔리(Parley)와 협업해 해안에서 수거한 폐기물을 재활용해 만든 울트라 부스트 팔리 러닝슈즈가 2017년 100만 켤레 이상 판매됐다.

영국 스타트업 브랜드 ‘데이비 제이(DAVY J)’는 100% 재생 나일론 에코닐(ECONYL)로 만든 수영복 브랜드다. 버려진 어망 1t으로 1만 벌 이상의 수영복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 출시했다.

한편 유럽의 남성 밀레니얼 세대는 패스트패션 소비에 책임감을 느끼고 역사와 전통을 지닌 브랜드를 다시 주목하고 있다. 이들 세대가 찾는 대표적인 브랜드로 프랑스 남성 언더웨어 브랜드 ‘슬립 프랑세(Slip Français)’, 포르투갈 스트릿 패션 브랜드 ‘홈코어(Homecore)’, 단순하지만 우아한 제품을 만드는 프랑스 브랜드 ‘발리바리(Balibaris)’ 등이 있다.

패션 업계 관계자는 “유럽 패션 시장의 몇 가지 트렌드만 분석해보고 진출 전략을 세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작은 규모로 빠르게 진출해 시장 반응을 보면서 전략을 수정·보완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디자이너 의류 브랜드 오아이오아이처럼 처음엔 블로그 판매로 작게 시작해 시장 반응을 살펴보면서 규모를 키우는 것도 방법이다. 박주영 한국유통학회장은 “전 세계가 온라인으로 상호 연결되면서 2020년까지 9억4000만 명이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통해 1조달러를 소비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매장 오픈을 통한 직접 진출보다도 온라인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plus point

밀레니얼 세대 취향 저격 구찌의 성공 비결

구찌와 소비자 간 소통 창구가 된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인스타그램.
구찌와 소비자 간 소통 창구가 된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인스타그램.

“모피를 쓰는 게 현대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 모피를 사용하는 건 조금 구시대적인 발상 아닌가.”

구찌의 회장 겸 CEO인 마르코 비자리의 말이다. 그는 지난 2017년 ‘세계 소녀의 날’을 맞아 런던 컬리지 오브 패션에서 열린 2017 케링 토크에서 2018년부터 구찌 제품에 동물 모피 사용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전 세계 젊은 고객 대다수가 동물 모피 사용을 선호하지 않고, 구찌 고객의 40% 이상이 밀레니얼 세대라는 점, 기술 혁신으로 천연 모피를 대체할 만한 패션 소재가 개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2017년 구찌의 모회사 케링의 주가수익비율(PER)이 사상 처음으로 루이뷔통의 모기업인 LVMH를 제치면서 구찌가 밀레니얼 세대의 취향을 적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7년 상반기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43% 증가했고, 하반기 매출은 전년보다 69% 늘었다.

구찌는 제품 색상과 패턴을 다양화하고 생산 교체 주기를 다르게 해 제품군을 확대한 전략이 밀레니얼 세대를 만족시킨 것으로 분석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활발히 정보를 얻는 밀레니얼 세대를 공략하기 위해 디지털 활용도도 높였다.

특히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인스타그램은 차기 시즌 구찌의 상품 기획 방향과 디자이너 개인 취향을 알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고 있다.

백예리 기자, 유수진 PFIN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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