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희 서울대 기계설계 공학박사, 삼성전기 전략기획 고문 /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전병희
서울대 기계설계 공학박사, 삼성전기 전략기획 고문 /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환자의 암 조직에서 세포를 직접 채취하는 ‘조직생검’ 대신 혈액으로 암을 판별하는 ‘액체생검(Liquid Biopsy)’ 기술이 바이오 업계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피 한 방울만으로 암세포의 종류와 숫자 등을 추적할 수 있어 간편하고, 정확도가 높다. 암세포를 조기에 찾아내는 것뿐 아니라 수술 뒤 예후를 확인할 수 있고, 암 치료제 신약 개발사가 신약의 효과를 확인하는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다. 손쉽게 암세포를 추적하는 액체생검은 세상을 바꿀 미래 기술로 꼽힌다.

유수의 글로벌 기업이 액체생검 기술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시장에서 토종 한국 기업 ‘싸이토젠’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의 3대 제약사 다이이찌산쿄가 2018년 2월 폐암 신약 개발에 싸이토젠의 기술을 채택했고, 현재 국내 제약사 큐리언트와 에이치엘비, 웰마커바이오가 싸이토젠 기술을 통해 신약을 개발 중이다. 설립 10년 만에 거둔 성과다.

싸이토젠의 약진, 그 뒤에는 공학도 출신 전병희 대표의 활약이 있다. 삼성전기 전략기획 고문으로 삼성그룹 신사업 발굴을 모색하던 중 암세포가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다 다른 장기에서 번식하면서 전이가 된다는 논문을 접하게 됐고, 그는 나노 기술을 바이오에 접목해 혈액 속에서 암세포를 추출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삼성그룹에서 채택하지 않은 이 아이디어를 들고나와 회사를 차리고 직접 실행에 옮겼다.

싸이토젠은 지름 5㎛(마이크로미터)의 사각 구멍을 촘촘하게 뚫은 손톱만 한 칩에 혈액을 넣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암세포인 혈중종양세포(CTC)를 걸러낸다. 7㎛ 안팎인 암세포는 걸러지고 이보다 작은 적혈구와 백혈구는 빠져나간다. 세포가 구멍에 긁혀 훼손되지 않도록 반도체 나노기술을 활용해 바이오 코팅 처리를 했다. 이를 이용하면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등 영상장비로 찾지 못하는 암세포까지 식별할 수 있다. 인공지능(AI)이 촬영된 암세포 사진을 분석하는 기술도 적용했다. 덕분에 병리과 의사가 진단 결과를 분석하는 데 3시간 걸리는 작업을 10분으로 줄였다.

‘이코노미조선’은 1월 28일 서울 문정동에 있는 싸이토젠 본사에서 전 대표를 만났다. 기술 개발부터 투자 유치, 기술 판매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분야가 없다. 혈혈단신의 공학도가 바이오 업계에 안착하기까지 길고도 짧았던 10년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최근 글로벌 제약사와 제휴 논의가 활발한데.
“올해 1월 열린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에 참가해 13개 바이오 기업과 미팅을 했다. 지난해 4곳에 비해 크게 늘었다. 이번 미팅으로 2월 둘째 주에 8개 회사와 일본에서 순차적으로 후속 미팅을 진행하기로 했다. 엄청난 결과다. 지난해에 유럽 암 컨소시엄이 싸이토젠의 CTC 장비를 표준 플랫폼으로 정해 활용하고 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전 세계에 싸이토젠의 이름을 알리게 됐다.”

싸이토젠의 차별화된 강점은.
“암세포가 혈액 속을 돌아다니다 떨어져 나온 조각을 검사하는 CT-DNA는 이미 죽은 세포의 조각이라 암의 진행 상황을 알기 힘들다. 반면 살아있는 상태의 암세포를 잡아내는 CTC 기술은 현재의 상태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암을 진단하고 신약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핵심 정보를 제공한다. 살아있는 암세포를 포획하는 것이 싸이토젠의 강점이다.”

살아있는 암세포를 포획하는 기술을 보유한 회사는 싸이토젠이 유일한가.
“전 세계적으로 상용화 단계에 있는 회사가 두 군데 정도고, CT-DNA 기업은 몇 군데 더 있다. 상용화된 기술은 있지만 이걸 자동화한 회사는 우리가 유일하다.”

CTC 기술 글로벌 5대 기업에 이름을 올리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CTC 자체로만 보면 이미 5대 기업 수준이다. 다만 회사 규모라든지 성장 정도, 미래 가치를 보면 상당히 부족한 게 많다. 올해 이런 부분을 확장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올해가 지나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동안 상장 지연 등 위기가 많았는데 어떻게 극복했나.
“기술 개발을 하고 나면 검증을 해야 하고, 검증을 받고 나면 마케팅을 해야 한다. 한 단계 한 단계 지날 때마다 자금이 고갈된다. 2014년 마젤란 기술투자로부터 첫 투자를 받기까지 4년간 데스밸리(Death Vally·신생기업이 자금 조달 등의 어려움으로 도산 위기에 빠지는 것)를 거쳤다. 그 기간은 정부 과제를 하고, 타사 최고기술책임자(CTO)로서 보유한 지분으로 겨우 버텼다. 회사가 어려웠지만 단 한 번도 직원 급여 지급을 미룬 적이 없다. 상장도 쉽지 않았으나 기술특례 상장 문턱이 낮아진 덕에 상장할 수 있었다.”

성장사다리펀드 등의 방법도 있었을 텐데.
“정책 투자를 받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신약 개발 회사는 투자를 받기가 그나마 쉽다. 기업 가치를 산출하는 절차 등이 잘돼 있다. 반면 의료 진단 기기 업체들은 기술 원리가 달라 미래 가치가 상당히 저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후발 제약사나 진단 기기 기업에 조언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최근 2~3년간 국내에만 1000여 개의 제약회사가 생겼다. 치열한 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기술, 차별화된 시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비용을 최소화하고 성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싸이토젠의 기술은 좋은 솔루션이 될 것이다. 진단 기기 업체에는 차별화된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고객과 시장을 중심에 둔 비즈니스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내 제도나 규제에 있어 개선해야 할 부분은.
“미국에는 CLIA(미국실험실표준인증) 랩이라는 제도가 있다. 실험실 자체를 허가받아서 서비스하기 때문에 신기술 적용도 쉽고 시장 진입이 쉽다. 반면 한국은 모든 걸 다 허가받아야 한다. 그래서 비용은 늘어나고 서비스할 수 있는 건 없다. 또 미국의 경우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일단 사용하게 하는 네거티브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아주 작은 회사도 아이디어가 있으면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환경이다. 한국은 적정 규모가 되지 않으면 사업하기 힘들다. 아이디어가 시장으로 가는 시간이 짧아야 성공 확률도 높아지는데 그게 아니니 성공 확률도 당연히 낮다.”

앞으로 10년의 목표는 무엇인가.
“반드시 CTC 업계 세계 1위 자리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췌장암 치료 효과 모니터링부터 폐암 면역치료제 내성 진단, 유방암과 전립선암이 뼈로 전이돼 또다시 암을 일으키는 것을 미리 진단하고 치료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 기술 중 몇 개는 1~2년 내 임상이 완료된다. 암의 전이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기술, 암의 재발과 치료 효과를 추적하는 기술 부분에서 싸이토젠은 글로벌 톱 기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