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서울 DDP 히노스레시피에서 배우 감우성을 인터뷰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5월 21일 서울 DDP 히노스레시피에서 배우 감우성을 인터뷰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감우성은 양수리에서 인터뷰 장소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히노스레시피’까지 혼자서 차를 몰고 나타났다. 20년 된 아톰 티셔츠를 입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한 사내는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건물의 이 현대적 레스토랑과 잘 어울렸다. 그는 인터뷰에 앞서 가져온 와인을 오픈해 달라고 부탁했다.

올해 한국 나이로 49세인 감우성은 지난 4월 말 종영한 SBS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에서 50세에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한 남자를 연기했다. 드라마에서 그랬듯, 현실의 감우성은 젊지도 늙지도 않았다. 단지 ‘잘 낡아 있었다’. 그에게서 길이 잘 든 가죽 가방 같은 감촉이 전해졌다.

감우성의 언론 인터뷰는 거의 10년 만이다. 그의 인터뷰 소식이 알려지자 팬 카페는 기쁨과 의혹으로 출렁였다. 4년 만에 한 작품씩 출연해서 팬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올림픽 배우’이자 은둔형 인간으로 알려진 감우성. 그는 자신의 은둔이 신비주의가 아니라 ‘생존 기술’이라고 했다. 벌레가 풀에서 숨을 죽이며 살듯, 그 자신은 전원에 ‘숨어’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드라마에서 육체가 녹슬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됐다.
“처음엔 ‘오십 먹은 역할을 나한테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역할에 맞게 자연스럽게 바랜 외모를 만들었다. 껍질이 얇고 마르고 주름이 있고 흰머리가 내려앉은…. 사실 나는 언제 그런 얼굴이 될까 기다렸다.”

연기할 때마다 심하게 앓는다고 알고 있다.
“아프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 ‘알포인트’를 찍을 때는 캄보디아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맸고, 드라마 ‘산’을 찍을 땐 에베레스트산에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았다. 그러나 가장 힘든 건 배역에 깊이 빠졌다가 나오면 겪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이다. 사고를 겪고 난 것처럼 후유증이 심하다. 결국 그것도 내 욕심 때문이다. 잘하고 싶으니까.”

‘손무한(‘키스 먼저 할까요’ 극 중 이름)’이라는 배역에서 빠져 나오기 힘드나.
“아니다. 나는 그와 철저히 이별했다. 그의 잔재가 나에게 남아서 힘든 게 아니라 몸이나 정신을 훼손시키면서까지 연기한 후의 후유증을 처리하지 못해 힘든 거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 무대 뒤에서 극심한 환각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그 증상을 아주 심하게 겪는다. 타인의 죽음을 보면 그 고통의 과정이 세포 하나하나에 다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더 욕심을 내자면… (한참 뜸을 들이다가) 내 드라마를 본 분들도 그랬으면 한다. 되도록 오래 캐릭터의 잔상이 머물러 시청자의 일상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이렇게 말하곤 그는 “혹시 ‘일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봤는가?”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시적인 영화”라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일포스티노’에서 시골뜨기 집배원 역할을 맡은 마시모 트로이시는 촬영 도중 심장병 진단을 받고도 촬영을 강행했다. 영화 속에서도 죽었고, 실제로도 촬영이 끝나고 12시간 후 사망했다. 가끔 그 영화를 생각한다.” 그 말은 나를 몹시 당황케 했다.

어쨌든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기쁘다. 매일 아침 SNS에 ‘굿모닝’이라는 인사를 남겨야 할 것 같다. 계속 삶을 이어 가는 기분이 어떤가.
“(미소 지으며) 살아 있다는 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불현듯 내가 스스로 파놓은 무덤에 갇혀서 고통을 즐긴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삶을 비관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건 어리석다. 힘든 연애 끝에 결국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되듯, 살아 있다는 건 참 질기게 위대한 거다. 이렇게 앉아서 대화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말이다!”

당신은 드라마에서 ‘나 죽어요’와 ‘사랑해요’를 거의 같은 톤으로 담담하게 연기했다. 현장의 화자와 청자의 심장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래서 더욱 간결하게 말했다. 예측할 수 없도록.”

시한부 삶을 사는 당신 옆에서 잠을 깬 상대 배우 김선아가 매일 아침 떨리는 마음으로 ‘굿모닝’을 속삭이듯, ‘나의 굿모닝’에 대수롭지 않게 응답하는 ‘너의 굿모닝’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그때 알았다.
“생각해보면 상대에게 최소한의 충격을 주고 싶다는 의지가 반영돼서 나온 톤이 아닌가 싶다. 내 이야기를 듣는 상대를 배려하고 싶었다.”

김선아씨 이야기인가?
“그렇다. 김선아씨는 철저히 감정으로 연기하는 배우다. ‘로코퀸(로맨틱 코미디 퀸)’으로 명성이 높은 배우라, 나는 그녀가 기술과 경험을 섞은 효율적인 연기를 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100% 감정으로 연기하더라. 그렇게 감정을 다 쓰고도 그녀가 인정과 사랑을 받는 배우로 건강하게 오래 살아남은 게 놀라웠다. 마치 젊은 시절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3학년 재학 중 MBC 공채 20기로 연기를 시작했다. 한석규가 그와 공채 동기다. 당시엔 모두 1년 단위 계약직이었다. 

성정은 여리지만 자기 신념이 강했던 이 사내는 학창 시절부터 방송국을 거쳐 군대를 제대하기까지 기나긴 시간을 구타와 함께 보냈다. “내 인생은 26세까지 맞는 게 일이었다. 너무 맞아서 ‘생활의 달인’에 나가도 될 정도였다.” 군대에서는 당시 인기 있었던 차인표, 이휘재, 구본승과 스물 몇 편의 군 영화를 찍었다. ‘노역’이라 할 만큼 고된 ‘연기 막노동’을 거쳐 제대하던 날을 그는 잊지 못한다.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 포스터. 사진 SBS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 포스터. 사진 SBS

“강원도 화천이었다. 부대 앞 매점에서 소주 한 병에 삼포만두를 안주로 먹었다. 날씨는 좋았지. 그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척 행복했다. 아무도 때릴 사람이 없었고, 이젠 버스만 타러 가면 되는구나. 이제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되는구나.” 갑자기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급커브를 도는 히스테릭한 웃음이었다. 아니다. 그것은 트릭이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감우성은 언젠가부터 눈물샘이 고장 났다고 했다. 삶의 강한 긴장과 압력을 필사적으로 감내해온 한 남자가 과거의 ‘해방감’을 추억하며 웃고 있다. 아니 울고 있다. “촬영장에서도 종종 이랬다. 메이킹 필름을 보면 웃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았다.”

토씨 하나까지 이미지 전략으로 계산된 홍보 사회에서 불안하고 자기 보호적이고, 지적이고 개인적이고 가식 없는 순수한 예술가를 만나는 건 매우 이례적이라 숨을 죽였다.

드라마 ‘연애시대’ 포스터. 사진 SBS
드라마 ‘연애시대’ 포스터. 사진 SBS

이준익 감독과 영화 ‘왕의 남자(2005년작)’에서 광대 장생으로 살 때는 어땠나. 해방감을 느꼈나.
“나는 ‘왕의 남자’로 이미 꿈을 이뤘다. 최고의 대본으로 좋은 감독, 좋은 동료들과 일했고 최선을 다했고(그는 1년 동안 연습해 실제로 줄 위에서 자유자재로 놀았다), 결과도 좋았다. ‘왕의 남자’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다른 대작 영화들이 1000개가 넘는 개봉관을 차지하는 멀티플렉스 물량 공세로 기록을 낸 데 비해, ‘왕의 남자’는 전국 230개 개봉관만으로 1230만 관객을 동원했다.”

감격했을 것 같다.
“나는 잘 흥분하지 않는다. 일하는 과정에선 곧잘 흥분하지만 결과엔 냉정하고 차분하다.”

그럼 어디에서 위로받나.
“작품이 끝나고 내가 ‘떳떳하다’라는 감정으로다. 호평이든 악평이든 평가는 두렵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평가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확률이 높다. 그러니 나 자신의 떳떳함이 중요하다.”

당신을 ‘멜로의 장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더라.
“(함빡 웃으며) 정말 좋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다소 헐겁고 아쉬운 부분도 있었겠지만, 우리 모두 성숙하게 대처했으니까.”

‘연애시대(2006년 SBS 드라마)’와 비교하면 어떤가.
“나쁜 비교 대상은 아니다. 가끔 엉뚱한 연관성을 찾는 분들이 있지만 내겐 아련한 추억일 뿐이다.”

후회될 때는 없나.
“없다. 이번 드라마에서도 ‘낡고 삭아야 한다’는 내 지론에 처음엔 제작사가 반대했지만 한 달이 지난 후 ‘당신 말이 맞다’고 하더라. 시간이 지난 후엔 다 인정받았다. 작품의 완성도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주장했던 표현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이 연기하는 걸 누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나.
“(한참 뜸을 들이다) 와이프는 말이 별로 없다. ‘어땠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한다. 어느 날 드라마를 보는 내 곁에서 관심 없는 척 왔다갔다 하더니 슬며시 앉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울었다. 사실은 어제도 혼자 보고 울었다고…. 아내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명료하게 말하진 않는다. 속이 깊은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 곁에서 동요하지 않고 견뎌주는 거, 그게 사랑이라고 나는 느낀다.”

감우성은 MBC 공채 20기 탤런트로 만났던 강민아씨와 15년 연애 끝에 2006년 호주의 한 호텔 수영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약식으로 치러진 결혼식은 감우성의 아는 선배가 주선한 호텔 내 현지 외국인이 주례를 섰고, 30분 만에 끝났다.

경기도 양평 전원주택에서 사는 삶은 어떤가.
“내가 그곳에 사는 건 벌레가 살기 위해 잔디와 똑같은 색깔로 지내는 것과 같다. 나는 아내와 함께 텃밭을 가꾼다. 꽃은 집사람이 살피고 나는 잡풀을 제거하거나 전지를 한다. 아이는 없지만 동물을 키우다 보니 집 안팎으로 생명감이 가득하다.”

5월의 어느 날, ‘운 좋게도’ 천연기념물에 가깝게 보존된 한 완벽주의자와 긴 시간을 보냈다. 생존을 위해 고립을 택한 남자는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서 격의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어린 시절 드나들었던 동시 상영관과 그곳에서 보았던 ‘야한’ 영화들에 대해. 텅 빈 놀이터에 홀로 나가 마주하곤 했던 한겨울의 석양에 대해.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가서 브레이크 댄스를 출 때 비에 젖은 강당에서 얼마나 많이 미끄러졌던가에 대해. 아이유와 자우림의 노래가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지에 대해. 당장 밝힐 순 없지만 작품에 관해 놀랄 만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할 땐 기쁨으로 동공이 활짝 열렸다. 서울에 사무실이 생기면 기타를 치면서 시간을 보낼 거라고도 했다.

좋은 배우가 되면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고 기대하나.
“글쎄. 한때 아주 이상한 대본을 받아 들고 항의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PD가 그러더라. ‘너는 좋은 대본 갖고만 연기해봤냐?’ 그때 이후로는 앞으로 받을 좋지 않을 대본에 늘 대비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부딪침도 있었지만 지금은 갈등 없이 대처하는 기술을 익혔다. 좋은 배우가 꼭 좋은 인생을 사는 건 아니다. 화려하고 완벽한 것과 행복이 꼭 일치하진 않더라.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진 않다. 그저 감사하게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