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부터 UCLA 교수, 2008년부터 링컨센터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정식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리처드 용재 오닐. 그가 이끄는 앙상블 디토와 디토 페스티벌은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리처드 용재 오닐의 비올라 케이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2007년부터 UCLA 교수, 2008년부터 링컨센터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정식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리처드 용재 오닐. 그가 이끄는 앙상블 디토와 디토 페스티벌은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리처드 용재 오닐의 비올라 케이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나는 그가 연주하는 동요 ‘섬집 아기’와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사랑한다. 그의 연주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 탱고를 추는 것 같은 낙천성과 용기가 가득했다. 그의 비올라 소리는 태풍이 몰아치는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멀리 나아갔다가 인내심 있게 돌아왔다. 고독해서 비옥한 소리였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받은 도움만큼 도움을 되돌려 주기 위해 음악을 한다”고 했다. “비올라는 나의 목소리”라고 했는데, 실제로도 현악기의 질감이 성악의 질감으로 표현되곤 한다.

6월 5일 리처드 용재 오닐(39)을 만났다. 가늘게 찢어진 눈과 따스한 갈색 동공, 아이 같은 들창코와 선명하게 각이 진 고집스러운 턱에서 철학자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리처드 용재 오닐의 비올라 케이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리처드 용재 오닐의 비올라 케이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당신이 연주하는 ‘섬집 아기’는 정말 특별하다. 나는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엄마가 아기를 재울 때 불러주는 노래가 ‘섬집 아기’라고 들었다. 내 엄마는 평범하지 않다. 신체장애가 있어 말도 어눌하다. 할머니는 내가 엄마의 언어를 배울까 걱정하셨고, 그래서 밤마다 우유 한 잔을 떠놓고 책을 읽어주셨다. 주로 그 시간을 떠올리며 연주한다.”

6·25전쟁 고아로 미국에 입양된 그의 어머니 이복순씨는 어릴 때 열병으로 지적장애인이 됐고, 미혼모로 그를 낳았다. 미국인  할머니는 10년 동안 불평 한 번 없이 왕복 4시간을 운전해 그를 음악교실에 데려다 줬다.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작은 마을 ‘세큄(Sequim)’의 오두막집에서, 할아버지 페리 오닐은 2005년 타계할 때까지 TV 수리점을 꾸리며 36명의 입양아를 보살폈다. 용재의 비올라 소리에는 이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모성애가 강한 편인가.
“그런가 보다. 케냐에서 만났던 한 엄마를 생각하며 연주할 때도 있다. 5명의 아기를 다 먹이지 못해 1명을 포기하면서 구슬프게 울었던 게 잊히지 않는다. 박테리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도 모성애 때문이다. 낙태될 수도 있는 생명이었는데, 어머니가 나를 지켜줘서 이 자리에 있는 거다.”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나.
아주 잘 지내신다. 20년 전에 만난 파트너 빌과 잘살고 있다. 작은 마을 식당에서 청소일을 하고 있다. 정부에서 주는 일자리가 아니라, 자립하고 싶어 한다.”

당신은 존재의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나.
“나는 본의 아니게 삶이 자주 바뀌는 환경에 살았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동시에 하루하루가 큰 기회였다.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누구를 도울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렇게 뿌리를 파고들기보다 ‘나’라는 나뭇가지가 여기까지 뻗어온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당신은 한 명의 클래식 연주자라기보다는 우리 시대의 ‘위로자’ 같다. 특히 안산의 ‘헬로 오케스트라’에서 24명의 다문화 아이들을 이끄는 활동은 특별하다.
“아이들에게 시간을 더 쓰고 싶다. 완전히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초등학생이 고등학생이 되면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경제적인 것, 대학 입시, 아르바이트…. 내가 부모가 아니니 그 아이들 삶에 전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도 스스로 헤쳐나가도록 그 방법을 찾아주고 싶은데, 쉽지 않다. 조부모와 사는 아이도 있고,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는 게 가장 안타깝다.”

그들에게 깊이 감정을 이입하는 것 같다.
“당연하다. 나는 비올라 연주자고 비올라는 중간자다. 바이올린의 고음부와 첼로의 저음부 사이에 있다. 양쪽 입장에서 그 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어떻게 도와줄까 연구한다. 타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느낌을 받아들이면 내 내면의 소리도 깊게 성장한다. 감정 이입과 공감은 내 본능이다.”

오닐은 자신이 음악의 해석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해석자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불운을 행운으로 통합하는 그의 천부적 능력이 그를 비범한 비올리스트로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비올리스트로서 그는 최초로 줄리아드 음대의 아티스트 디플로마(최고 연주자) 과정에 입학했고, 2006년 미국 클래식계 최고 권위의 에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상을 받았다. 앨범 ‘눈물’이 국내 클래식 음반 판매 1위를 기록했고, 3집 ‘겨울 여행’은 발매 1주일 만에 7000여 장이 팔리는 기록을 세우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2006년 클래식 아티스트의 영예인 에버리 피셔상을 받을 때는 기분이 어땠나.
“지금도 비올리스트가 많지 않지만, 그때는 더 흔치 않았다. 에버리 피셔상은 내가 뉴욕에 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받았다. 당시 뉴욕은 내게 거칠고 무례한 도시로 다가왔다. 돈이 없어서 17달러짜리 지하철 탑승권도 사지 못했다. 줄리아드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이 됐는데, 생활비가 없어서 친구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돌아보면 그때 친구들의 도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 이후 내 인생에 많은 일이 있었다. 2007년 실내악 프로젝트 그룹 ‘디토’를 시작했고, 그래미어워드 후보가 됐고,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LA) 교수가 됐다. 인생의 큰 흐름은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거다. 죽을 때 주머니에 넣어가는 건 돈이 아니라 추억이지 않나.”

당신만의 연주 방식이 있나.
“기술적인 것은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하모니를 상상한다. 사실 작곡가의 대곡을 허물고 맞출 때 굉장히 힘들다. 연주자 입장에선 알을 깨고 병아리가 돼서 나오는 과정이다. 어떤 경우든 위대한 연주자가 작곡가의 세계를 해부한 후 다시 재조립해낼 때 청중의 귀엔 마법이 펼쳐진다.”

연주자의 자율성과 곡의 정체성 중에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나.
“곡의 정체성이다. 음악을 표현하려는 연주자는 무대에서 본인은 사라지고 음악만 남는다. 인상을 남기려는 연주자는 무대에서 본인만 남는다. 나는 음악을 표현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 자아는 완전히 사라진 채로.”

실제로 곡을 연주한다기보다 음악이 신체로 스며들어 용재 오닐이 연주되는 것을 보는 기분이 든다. 특별히 완성도가 높았다고 기억하는 공연이나 앨범이 있나.
“유니버설 뮤직의 비올리스트로 흔치 않게 9집까지 앨범을 냈다. 고마운 일이다. BBC 오케스트라와 예술의전당에서 월튼 소나타 협주곡을 라이브로 레코딩할 때도 좋았다. 곡도 좋았지만 BBC와 함께했다는 게 무척 자랑스러웠다.”

디토 프로그램 중 거장과의 협연도 흥미롭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기돈 크레머와 함께 연주한 경험은 어땠나.
“정경화 선생은 활화산 같은 분이다. 불굴의 의지로 그 자리에 올랐고 젊은 연주자들에겐 그 자체로 전설이다. 기돈 크레머는 마법사이자 부처 같은 사람이다. 말이 거의 없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와 연주하면 관객과 특별히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돈 크레머는 뭐랄까, 완전히 내려놓고 연주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느낌이 드는 작곡가가 있나.
“쇼스타코비치, 그의 음악은 어둠의 깊이만큼 아름답다. 베토벤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대곡을 썼고 청각장애라는 신체적 역경도 극복했으니까.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시대와 제2차세계대전을 겪었고 빚에 허덕이며 살았다. 그 삶의 참혹함은 음악에 깊은 골짜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 지난 세기 작곡가 중에 가장 위대하다.”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과 나치의 러시아 점령 기간에 활동했다. 러시아에선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봉쇄’ 기간, 100만 명 이상이 굶주림과 폭격으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가구에서 아교풀을 긁어먹고 키우던 고양이를 먹었으며 거리의 시체를 잘라 먹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쇼스타코비치는 매일 아침 6시 정장을 차려 입고 작곡했다. 독일군의 폭격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잉크가 마를 때까지 기다려 악보를 챙겨 방공호로 가져갔다.

음악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용재 오닐은 음악은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믿을 수 있는 종교라고 했다. 침몰하기 전까지 품위 있게 연주했던 ‘타이타닉’ 호의 악단처럼,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음악에는 공포를 유보하는 담대함이 있다. 공중에 한 음 한 음 음표를 튕겨내듯,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우리는 음악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삶과 죽음, 흑과 백만이 뚜렷한 이분법의 세상에서 음악은 놀라운 형태로 삶의 복잡성을 담아낸다. 베토벤이나 브람스는 우리가 삶의 미스터리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용기(courageous)를 뜻하는 ‘용(勇)’과 재능(talented)을 뜻하는 ‘재(才)’를 합친 가운데 이름은 연주 앙상블 세종솔로이스츠를 창단한 바이올리니스트 강효 예술감독이 그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용기(courageous)를 뜻하는 ‘용(勇)’과 재능(talented)을 뜻하는 ‘재(才)’를 합친 가운데 이름은 연주 앙상블 세종솔로이스츠를 창단한 바이올리니스트 강효 예술감독이 그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인터뷰가 끝난 뒤 며칠 후 나는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디토와 미샤 마이스키가 연주하는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5중주를 감상했다. 그들의 연주엔 웅장한 슬픔과 황홀한 리듬이 깃들어 있었다. 시체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 울리는 사랑의 찬가처럼. 첼리스트 마이스키의 선율은 심오했고, 스티븐 린의 피아노는 폭풍과 이슬을 뿌려댔으며, 검은 옷을 입은 사제 같은 우리의 용재는 비올라와 한 몸이 돼 완전히 음악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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