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서울284에서 9월 24일까지 열리는 ‘개성공단’전시. 사진 이미혜
문화역서울284에서 9월 24일까지 열리는 ‘개성공단’전시. 사진 이미혜

평양냉면집은 오늘도 줄이 길다. 남북정상회담 환영 만찬에서 옥류관의 수석 요리사가 만든 냉면이 식탁에 오른 이후 평양냉면은 올여름 최고의 히트 아이템이 됐다. 북한의 대외 선전용 주간지 ‘통일신보’에 따르면 이 평양냉면을 더욱 맛있게 먹는 법은 따로 있다. ‘식초를 국숫발에 친 다음 육수에 말아 먹어야 제맛’이라나. 펄펄 끓는 한반도를 더욱 뜨겁게 달구는 게 비단 평양냉면의 육향뿐일까. 지금 예술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키워드는 북한이다.

문화역서울284에서는 전시 ‘개성공단’이 한창이다. 개성공단은 기묘한 장소다. 서울에서 60여㎞, 도라산역을 넘어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5~6㎞ 떨어진 개성시 봉동리 일대는 북한의 대남 군사전력상 꽤 중요한 지점이었다. 햇볕정책의 온기가 감돌던 2000년, 6·15 공동선언은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인력이 결합된 남북경제협력지구를 탄생시켰다. 개성공단은 2004년 12월부터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 이후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지만 공단의 일상은 누군가에겐 지속되는 삶의 현장이었다. 2016년 개성공단이 완전히 폐쇄되기 전까지는.

10여 팀의 작가들이 참여한 이번 전시는 정치 관련 뉴스에서나 보던 개성공단 자체보다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분단 현실과 남북 평화의 상징물이자 조금 독특한 일터로서의 공단,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며 밥을 먹고 바느질하고 웃음을 나누던 남과 북의 사람들과 그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모습이라 전시는 신기하기만 하다. 이부록 작가는 구서울역사의 귀빈예비실에 ‘로보다방’이라는 가상의 커피점을 차렸다. 북측 노동자에게 제공됐던 로보 물자(로동 보조 물자의 줄임말) 중에 믹스커피가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 마련한 이 공간의 테이블에는 개성공단을 상징하는 미싱과 찻잔이 놓여 있다. 테이블보에는 ‘품질은 타협이 없다’ ‘생산성 향상 극대화’ ‘질 좋은 제품이 폭포처럼 쏟아지게 하자!’ 등의 문구를 오방색으로 수놓았다. 남북의 협의하에 결정됐다는 이 생산 표어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오묘하게 뒤섞여 왠지 모를 귀여움을 자아낸다.


남 북 정치상황 미묘하게 풀어내기도

구로공단 여공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위로공단’으로 한국 미술계 사상 최초로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임흥순 작가는 2016년 11월 23일 개성공단 기업 정상화를 염원하며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던 장례식 퍼포먼스를 ‘형제봉 가는 길’이라는 영상 작품으로 새롭게 재현했다. 커다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진 2개의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을 제대로 다 보기 위해서는 양쪽을 부지런히 오가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백지영의 노래 ‘총 맞은 것처럼’을 테마곡처럼 활용한 최원준 작가의 영상 및 설치작품 ‘피륙의 결’도 흥미롭다. 립스틱 분실 사건을 놓고 두 여공의 미묘한 갈등과 남북의 상황을 미스테리물로 풀어내는데,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며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최원준 작가는 북한이 1970년대부터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건설한 아프리카 독재자들의 우상화 기념비와 건축물들을 찾는 프로젝트도 지속하고 있다.

‘개성공단’ 전시는 민감한 사회적 이슈와 맞물리며 뜻하지 않은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몇 해 전 지인 중 한 명이 트위터에서 놀이 삼아 북한 관련 글을 리트윗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갔다. 이건 실화다. 록 음악과 평양냉면을 좋아하며 머리숱이 조금 부족하다는 점 외에는 지극히 평범했던 이 익살맞은 청년 사진가는 2014년 상고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아 온전한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남북의 두 정상이 휴전선을 넘어 포옹하고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던 지난 6월 성수동에서는 ‘평양슈퍼마케트’라는 이름의 수상한 팝업 스토어가 문을 열기도 했다. 2016년 통일박람회에서 ‘평양커피’라는 프로젝트를 선보인 바 있는 브랜딩 전문 회사 필라멘트앤코는 21세기의 여느 사람들처럼 커피를 즐기고 하루를 살아가는 북한에 대해 젊은층이 보다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북한의 라이프스타일에 포커스를 맞춘 팝업 스토어을 기획했다. 가게를 채운 제품들은 새터민들이 만들고 필라멘트앤코가 패키지를 디자인한 것으로, 과자류가 주를 이뤘다.

‘딱친구 캔디’ ‘겹과자’ ‘룡성 맥주’ 등 북한에서 쓰는 용어로 제품명을 지었다. 예를 들면 딱친구는 북한 말로 매우 친한 친구 사이를 뜻한다. 선물 가게처럼 꾸민 매장은 온통 핑크색이었다. 빨간색이 아니란 말이다.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된 영국 파이돈 출판사의 북한 그래픽 디자인 책 ‘메이드 인 조선’의 표지도 핑크색이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북한을 소개하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고려 여행사’ 대표 니콜라스 보너가 수십 년에 걸쳐 수집해온 북한의 생활용품 사진 500여 장을 담은 이 책은 세계 유일의 북한 디자인 컬렉션 북으로 표지부터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관광엽서, 우표, 기차표, 항공권, 담배와 맥주, 식품 등의 라벨, 성냥갑, 병뚜껑 등 없는 게 없다. 북한의 생활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과 글귀가 이색적일 뿐 아니라 파스텔 톤을 주조로 한 컬러와 빈티지한 디자인이 아름답다.

영국 가디언의 건축 및 디자인 전문 저널리스트 올리버 웨인라이트가 직접 찍고 수집한 사진을 엮은 ‘Inside North Korea’ 역시 전 세계 네티즌의 입소문을 타고 인기다. 약 200여 장의 사진과 글로 북한의 건축과 인테리어에 대해 설명하는 이 책에 등장하는 평양은 동화 같은 색감으로 유명한 웨스 앤더슨 감독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책에 따르면 이와 같은 북한의 화려한 건축 디자인은 공산주의의 어두운 면을 감추기 위한 결과였다고 한다. 김일성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김정은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마치 놀이동산처럼 평양에 형형색색의 많은 건축물들을 지었다는 것이다.


북한만큼 매력적인 소재는 없어

아닌 게 아니라 북한에는 유니콘이 산다는 황당무계한 뉴스가 보도된 적도 있다. 사연은 이렇다. 2012년 북한은 동명왕의 기린굴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는데, 번역 과정에서 신화 속 전설의 동물 기린마가 유니콘으로 둔갑한 것이다. 꿈과 환상의 세계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이북 땅에서 이와 같은 아이러니한 현상들이 벌어지는 건 이곳이 워낙 수수께끼 같은 동네였던 탓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그것’처럼 선뜻 입에 담기도 어려웠던 북한에서 포니가 실제로 백두산을 뛰어다니며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는다고 한들 그 누가 실시간 인증샷을 찍어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북한이라는 가깝고도 먼 나라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심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무언가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드러나는 일상성 속의 비일상성을 좇는 예술가에게 북한만큼 매력적인 소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오는 9월 7일부터 11월 11일까지 이어지는 광주 비엔날레는 ‘상상된 경계들’이라는 주제 아래 북한을 화두로 한 기획전을 준비한다.

아무나 갈 수 없는 땅이지만 누구든 상상은 할 수 있다. 지난 7월 말 출간된 북한 소설집 ‘안녕, 평양’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 반갑다. 성석제, 공선옥, 김태용, 한은형, 이승민은 오직 이야기의 힘으로 우리를 군사분계선 너머 미지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평양을 상상 여행하며 여섯 편의 짧은 소설을 써내려갔다. 누군가는 대동강변에서 북한 최고 권위의 과학자를 만나 인터뷰했고, 또 다른 이는 평양에서 만난 어느 여배우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간첩으로 내몰린 불운한 사내의 슬픈 인생사와 간첩단 버스에 잘못 탑승한 인디 가수의 기막힌 사연도 있다.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애니메이터인 서인지 작가는 이 소설 속 등장 인물들과 배경이 되는 공간에서 받은 영감을 여섯 폭 병풍에 담아 ‘안녕 평양도’를 제작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평양냉면 한 사발을 들이켜며 느긋하게 북한을 여행하는 방법이다. 평양까지의 물리적 거리는 246㎞, 심리적 거리는 달나라보다 멀지만, 예술은 언제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우리는 이미 그곳에 있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