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작은 고통과 환희가 오가는 격랑과도 같다. 치솟아 오르는 환희의 순간은 짧고 고통으로 울렁대는 시간은 길다. 왜 그럴까. 매번 그럴까 생각하다 깨달았다. 내게 사랑은 바이러스 같아서라고. 내가 아닌 타인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삶 속에 받아들이는 건, 낯선 바이러스를 내 풍경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몸으로 맞이하는 일이다. 사랑이 귀한 만큼 걸맞은 환대가 벌어질 것 같지만, 실제는 격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집 전체가 흔들리고 지진이 난 듯 지각이 꿈틀거린다. 내 몸이, 내 마음이 말한다.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너는 그를 사랑할 거야. 계속할 거야.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힘들 거면 차라리 그만두면 어때. 가볍게 살랑살랑 사랑하던 그때가 그립지 않니. 침투하지 않던 삶, 스치듯 비비고 따스하게 감쌌다가 스르르 안긴 팔을 풀어서 휘휘 떠날 수 있던 날들, 그때로 돌아가면 어때. 저기 저 사람을 봐. 너보다 더 편하고 안정된 사랑을 하잖아. 저기 저 사람을 봐. 그보다 더 너를 아껴주고 사랑해줄 것 같잖아.


사랑만큼 많이 배우는 거 없어

사랑하는 삶이 정상값이라면 이토록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사랑은 다행히도 삶에서 자주 벌어지지 않는다. 타인을 내 삶으로 받아들여 내가 총체적으로 변화하고 거듭나게 하는 과정, 때로 집을 허물고 새로이 바닥부터 지어 올리는 일이란 게 어찌 쉽게 벌어지겠는가. 때로 그 고통은 우리를 더 존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하고, 때로 그 아픔은 우리가 가는 길을 더디게 한다. 그러나 깊숙한 만큼, 오래 걸리는 만큼, 드는 품이 많았던 만큼 변하는 것도, 얻는 것도, 배우는 것도 많다. 그렇게라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이미 시작됐다면 말이다.

사랑하지 않고 살았던 시간이 길수록 거부의 반응은 더 지독하다. 나를 사랑하는 게 힘든 순간일수록 믿을 수 없는 게 상대의 사랑이기도 하다. 이토록 초라하고 조잡한 내 존재를, 추레하고 보잘것없는 내 모습을 나만큼이나 잘 알게 될지 모르는 누군가를 세상에 또 하나 만드는 미친 짓을 왜 다시 시도하고 싶겠는가. 나도 내가 어여쁘지 않은데 어찌 감히 내가 가장 어여삐 여기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겠는가. 그럼에도 마음 한가운데에는 이 모든 모습을 새로이 발견하고 함께 재해석해줄 수 있기를 당신에게 기대하고 만다. 사랑의 자각은 바로, 지독히 겸손한 자기 인식과 지나치게 가파른 기대의 높이차에 아찔해질 때 시작된다.

며칠 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잘 보살펴 주는 게 좋아. 그로 인해 상대방이 나를 더욱 필요로 하고 사랑하게 될 때 정말 행복해.”

얼핏 들으면 당연한 말이지만 쉽지 않은 실천인 걸 알기에 그 거침없음에 감탄했다. 사랑의 감정을 기뻐하고 표현하고 그 사랑을 상대에 대한 헤아림과 보살핌에 아낌없이 쓸 수 있는 과정은 상당한 자기 확신과 용기 없이는 힘들기 때문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더 약자가 되고 더 연약하게 상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듯 느끼고 더 사랑하기에 더 쉽게 이용되고 더 간편하게 내쳐질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함께 있던 다른 친구가 말했다.

“그 사랑을 함부로 낭비하고 제대로 존중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미련 없이 손 털고 나올 수 있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아요.”

친구들의 현명함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과정이다. 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상대를 믿는 일은 나를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누군가 사랑하고 그 마음을 믿게 되면, 그 사랑으로 무장한 나의 저력을 믿게 되는 것 또한 아닐까.

작년 말부터 올 초까지 방영됐던 ‘그냥 사랑하는 사이’라는 드라마는 쇼핑몰 붕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순식간에 무너진 쇼핑몰 건물의 폐허 속에서 수십 시간을 버티고 구조됐어도, 그들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떠도는 그 이후의 시간이 남아있다. 암흑에서 구출된 몸을 마음은 오래도록 따라잡지 못한다. 생존자들의 황량한 얼굴들이 마침내 서로를 바라보고, 눈빛을 마주하고, 고통을 끌어안고 삶을 지탱하는 과정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어둠이 깊고 길었던 만큼 쉽지 않은 여정이다. 자신을 고통의 바이러스로 여기는 이들이, 또 다른 상처 입은 자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위로하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지 못할 삶을 인정하고 비로소 전면으로 끌어안는다. 타인의 아픔을 보듬으면서 자신의 아픔에 다다르는 여정은 더디고 고통스럽지만, 드라마가 끝날 무렵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두들 조금씩 붕괴된 존재임을. 고통의 깊이와 너비를 재지 않아도 고통으로 연결된 존재임을. 그리고 그 고통을 더듬고 헤아리고 보듬으면서 사랑을 배우게 됨을. 그 사랑으로 종국에는 나 또한 구원될 희망을 얻게 됨을.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초라함을 숨기기 위해 여자를 오래도록 외면한다. 여자는 그의 외면에도 천진한 얼굴을 쓰고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찾는다. 여자가 말한다. “매일 네게 올 거야. 내일도, 내일모레도, 그다음 날도 올 거야. 너를 기다릴 거야. 내가 너를 싫어하게 될 때까지.”

그녀의 고백에 내 마음까지 휘청거렸다. 저렇게 맑은 얼굴로, 저토록 강인한 말을 할 수 있는 마음속 풍경은 어떤 것일까. 나 또한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처음부터 그러했던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내 사랑이 소진될 때야 멈출 거라고. 하지만 이건 또 얼마나 사무치는 말인가. 소진된 후라면, 싫어하게 된다면, 지난 겹겹의 사랑은 어디로 가는 걸까.


멋지게 후회하고 실패하는 게 삶

누군가 내게 물었다. 두렵지 않나요. 사랑이, 사랑의 끝이, 당신을 버리고 갈지도 모를 그 사람이, 그 사랑이 무섭지 않나요. 우리는 자주, 미리 두려움을 살면서 현재를 망친다. 현재의 사랑에서 도망가서 미리 두려움을 살아낸다. 두려움이 미래의 몫이라면, 그 미래의 나에게 맡기자고 대답한다. 드라마 속 할멈이 말했다. “인생은 후회와 실패로 가득하다.” 하지만 계속 살아야 하는 건, 더 멋지게 후회하고 실패하기 위해서라고. 나 역시 할멈처럼 삶을 바라보고 싶다. 실패가 어차피 예정된 자리라면, 더 멋지게 착지하고 싶다. 모든 것은 끝이 난다. 끝이 만일 실패라고 여긴다면, 달리 말해서 모든 것은 실패한다. 그렇다면, 실패 또한 황홀하게, 열락의 추락으로, 우아한 하강으로, 유쾌한 떨어짐으로. 지금 내가 다짐하는 말이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