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천제단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 이우석
태백 천제단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 이우석

순백은 어떤 색보다 고결하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는 신부를 상징한다. 하얀 면사포를 쓰고 신 앞에 섰다. 모든 색의 채도를 뛰어넘는 것은 무채도, 무명도의 백색이다.

과도한 형형색색은 화려하지만 왠지 원시적 느낌이다. 영롱한 공작의 깃털도 새하얀 고니 앞에선 초라해진다. 귀족을 상징하는 색은 ‘순백’이다. 백마는 왕자의 말이요, 숲의 제왕은 백호로 친다. 심지어 알비노인 백사마저 귀하게 여겨왔다.

추운 겨울도 하얗기에 대접받는다. 노란 봄, 푸른 여름, 붉은 가을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눈이 내려와 쌓여 세상의 홍진(紅塵)을 덮고나면 그처럼 아름다운 풍경도 없다. 겨울 숲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자작나무다. 낙엽을 벗어던지고 하얀 수피를 드러낸 자작나무는 겨울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는 왕관이며 곤룡포다.

마침 수은주 역시 하얀색밖에 보이지 않을 무렵 하얀 자작 숲을 만나기 위해 강원도 태백으로 떠났다.

자작나무, 이국적이다. 언뜻 봐도 딱 핀란드 등 북국 겨울 숲이 연상된다. 겨울 동화책이나 ‘겨울왕국’ 애니메이션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사실 자작나무는 엄연한 토종 수종이다. 백두산 일대를 비롯해 개마고원과 강원도 북쪽 산간에 군락을 이루며 살아왔다. 게다가 귀족적이 아니다. 오랜 세월 우리 민초들과 함께해 온 삶의 벗이다.

버릴 게 하나도 없는 것이 자작나무다. 목재로는 물론이며 수액은 마시고 껍질은 씹어 약으로 썼다. 새하얀 수피가 요모조모 쓸만하다. 벗겨 종이 대신 글을 쓰거나 땔감으로 썼다. 불을 지피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붙은 이름이다. 자작나무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 ‘자일리톨 껌’ 때문인데 그래서 북유럽산으로 오해를 한다.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 자작나무 숲을 만날 수 있는데 대부분 인공 조림된 것이다. 인제군 원대리와 응봉산(수산리 일대), 횡성 자작나무 미술관 등 서늘한 산속에 있다. 국내 대표 고원지대 태백시에서도 곳곳에서 환상적인 자작나무 숲을 만날 수 있다. 한강, 낙동강, 오십천이 갈라진다는 삼수령 아래, 정선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두문동재 고갯길, 한강 최상류 광동댐으로 가는 길 원동마을 길가에도 촘촘히 박혀 있다.

눈이 가득하다. 18일부터 눈축제를 벌이는 중이다. 정선과 태백을 연결하는 숨통, 두문동재 터널 위 옛 고갯길로 향한다. 만항재(1330m)에 이어 해발고도가 국내 두 번째로 높은 고갯길이다. 정상을 오르다 차를 세우고 30분쯤 가면 자작나무 숲이 있다. 고한에서 태백으로 터널을 통해 넘어가다 입구에서 고갯길로 빠지면 된다. 늘 산그늘이 지는 곳이라 눈이 가득 쌓여있어 바퀴에 쇠사슬을 감거나 걸어 올라야 한다. 약 2㎞ 정도 구간이다. 눈길에 익숙하지 않아도 얼추 30~40분이면 충분하다.

길 옆 산허리로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다. 새하얀 그루가 새하얀 눈 위로 곧게도 뻗었다. 잎은 다 떨어져 그대로 드러난 하얀 줄기, 까슬까슬 껍질이 불거진 자작의 부대가 도열했다. 아름드리는 아니지만 첩첩 많이 몰렸다. 동화 속 그림 같다. 하얀 모피코트를 입은 여왕처럼 화려하다. 과연 ‘겨울의 귀족’이다. 귀족 작위에는 공작(公爵·Duke), 후작(候爵·Marquess), 백작(伯爵·Count), 자작(子爵·Viscount), 남작(男爵·Baron)이 있다. 참고로 영국 등 서양 작위로 알고 있지만 사실 고대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내려온 제후 계급이라고 한다. 자작은 끝에서 두 번째지만 나무에선 자작이 단연 으뜸이다.


태백 두문동재 자작나무. 사진 이우석
태백 두문동재 자작나무. 사진 이우석

도전적인 태백산 겨울 산행

한겨울 태백에서 자작나무 숲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모두 세 군데다. 가장 편한 곳은 삼수령. 삼수령 표석 아래 길어귀에 위치한 식당 ‘초막 고갈두’ 주차장 양옆으로 작은 자작나무 정원과 숲이 조성돼 있다. 귀네미마을 인근 상사미마을에서도 도로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내친김에 상고대까지 보려면 태백산 겨울 산행에 도전하면 된다. 새벽에 출발하면 일출과 상고대 모두 건질 수 있다. 유일사에서 천제단을 올라 당골광장까지 가는 짧은 코스(약 3시간 소요)를 추천한다. 워낙 고원인지라 장갑, 모자, 스패츠, 아이젠 등으로 추위와 탐방로 조건에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 부지런히 걷다 보면 등짝에 땀이 날 지경이지만 다른 상황은 상상을 초월한다. 보온병이 아닌 플라스틱 생수병을 차고 가면 모두 얼어붙어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다.

정상 부근에 괴사한 주목(朱木)이 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에 상고대가 서리면 그렇게 멋질 수 없다. 신비로운 자태로 이른 아침부터 태백산을 오른 등산객을 맞이한다.

영하 십 도를 넘나드는 강원도 산골 고원의 공기는 자작 숲을 거치며 보다 청량해진다. 순백의 숲을 지나치며 나도 모르게 이 맑은 공기를 들이켜대니, 도시에서 온 시커먼 몸도 마음도 하얗게 표백되는 듯하다. 덜덜 떨며 눈밭을 헤쳐 걸어온 것에 대한 보상이 틀림없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5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다른 곳의 자작나무 숲 인제군 내린천 인근 원대리에 약 80만~90만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응봉산 수산리에는 100만 그루 정도가 조림되어 있다. 횡성군 자작나무 미술관은 아름다운 겨울 자작나무 숲속에서 문화의 향기까지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먹거리 태백 시내에는 ‘실비집’이란 상호가 많다. 맛있는 태백한우를 저렴한 가격에 맛보는 식당들이다. 상장동 배달실비식당은 한우 갈빗살이 유명한 곳이다. 고소한 고기를 연탄불 석쇠 위에 구워 먹는다.(033)552-3371. 태백 닭갈비는 쫄면과 라면 등 각종 사리를 넣어 먹는 전골 형태로 황지동 태백닭갈비가 잘한다.(033)553-8119. 매콤한 고등어, 갈치 등 생선조림은 황지동 초막고갈두가 꽉 잡았다.(033)553-7388.

눈 축제 제26회 2019 태백산 눈축제가 18일부터 2월 3일까지 17일간 태백산국립공원과 태백시 일원에서 펼쳐지는 중이다. 축제에선 대형 눈과 얼음 조각이 빚어낸 예술품을 만날 수 있다. 태백산국립공원에 21점, 시내 일원에 6점으로 작품 총 27점을 준비했다. 태백산 산행 코스이기도 한 당골광장에는 신화와 눈의 세상을 테마로 한 위대한 12신화의 광장, 신화의 문, 12신화의 신전, 용과 도깨비, 바람의 언덕, 산소도시 태백 작품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스노맨의 전설, 눈미로, 웰컴 태붐이, 태백에서 만나는 십장생, 황부자 이야기, 복돼지 소원지, 라이언킹 등 지역별로 다양한 테마를 선보인다.
이 밖에도 얼음과 눈 미끄럼틀, 얼음 썰매장. 미니 눈사람 만들기 체험, 어린이 자유놀이터, 추억의 연탄불 먹거리 체험, 대형 텐트 체험존, 스노아트존 등 남녀노소 모두에게 맞는 즐길거리가 즐비하다. 태백시축제위원회(033)550-2828.

이우석 스포츠서울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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