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내부 전경. 사진 현대카드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내부 전경. 사진 현대카드

지난해 말 현대백화점은 목동점, 판교점, 울산점, 부산점 식품관에 프리미엄 쌀 판매 전문매장 ‘현대쌀집’을 오픈했다. 고시히카리, 히토메보레 등의 이름난 쌀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이 쉽게 만날 수 없는 소규모 한국 토종 쌀 품종과 식기, 조리기구, 반찬까지 한곳에서 판매하는 콘셉트다. 일본의 유명 쌀 편집매장 아코메야 도쿄(Akomeya Tokyo)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1995년 스타벅스 재팬을 론칭한 스즈키 리쿠조 사장이 이끄는 사자비 리그(Sazaby League)가 2013년부터 운영하는 아코메야 매장에는 한 그릇의 쌀밥을 위한 모든 것이 있다. 전국의 일품 쌀과 현미는 물론 다채로운 식자재와 장인 정신이 담긴 조리 기구를 판매한다. 자신의 입에 맞는 쌀을 찾을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 이벤트가 열리며, 1㎏ 이상 현미를 구입할 경우엔 맞춤 정미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쌀을 트렌디하고 패셔너블한 소비 품목으로 바라보는 일본처럼 최근 국내에도 프리미엄 쌀 문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밥 소믈리에’라는 용어도 심심찮게 들린다. 지난해 12월 31일 밥솥 브랜드 쿠첸은 30명의 밥 소믈리에와 함께 밥맛의 알고리즘을 연구 분석하는 ‘밥맛연구소’를 출범한다고 밝혔다. 점점 더 다양해지는 소비자의 밥맛 취향에 맞춰 그에 적합한 밥솥을 개발하기 위함이다.

단지 사람들의 입맛이 까다로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라이프 스타일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얘기다. 배를 채우는 데 급급했던 시절을 지나 가격과 분위기를 따지는 외식 문화가 발전한 다음, 이제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기 삶의 취향을 반영한 생활 문화를 즐기는 일이다. 가구와 리빙 소품 매장이 갑작스레 많이 생겨나고, 서점이 때아닌 붐을 타며, 커피를 주제로 전시회가 열리는 요즘 상황과 프리미엄 쌀밥 문화는 같은 선상에 있다.

매년 ‘서울디자인페어’를 개최하며 ‘행복이 가득한 집’ ‘월간 디자인’ 등의 잡지를 통해 국내외 디자인계의 소식을 발 빠르게 전달해오던 ‘디자인하우스’에서 쌀을 전면에 내세운 레스토랑을 오픈한 건 우연이 아니다. 우리나라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토종 벼 1451종 가운데 절기에 맞춰 쌀을 준비해 아침마다 도정해 상을 차리는 인사동의 ‘행복한 상’은 밥과 반찬뿐만 아니라 눈매 좋은 공예가들의 그릇도 함께 판매했다. 과거형으로 얘기하는 건 얼마 전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밥맛은 꽤 좋았지만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의 유명 쌀 편집매장 아코메야 도쿄의 모습. 사진 아코메야 홈페이지 캡처
일본의 유명 쌀 편집매장 아코메야 도쿄의 모습. 사진 아코메야 홈페이지 캡처

쌀과 음식에 관한 강좌 열리기도

대신 잘되는 가게들이 생겨나고 있다. 서울 서교동과 성산동에 있는 ‘동네, 정미소’가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궁에 진상됐다는 ‘버들벼’를 비롯해 수십 가지 품종의 쌀이 진열된 이곳은 식당을 겸한 쌀 편집매장이다. ‘서울의 작은 골목과 시골의 농가가 교류하는 커뮤니티’로 한 달에 한 번 쌀과 음식에 관한 강좌가 열리기도 한다. 북흑조, 화도, 졸장벼처럼 이름도 생소한 토종 쌀을 판매하며 즉석에서 도정도 해준다. 점심과 저녁이면 구수한 쌀밥에 반찬을 곁들인 ‘오늘의 밥상’을 맛볼 수 있다.

맛을 경험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안하는 압구정동의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역시 쌀밥에 방점을 찍은 미식 공간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쿠킹 클래스가 매월 열리는데, 현대카드 회원만 이용 가능하다는 게 단점이다. 라이프 스타일 디자인 회사 제이오에이치(JOH)가 직원들에게 맛있는 밥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가 입소문을 탄 한남동의 ‘일호식’도 있다. 우렁이 농법으로 생산한 화선찰벼와 신선찰벼를 칠분도미로 도정해 혼합해 밥을 짓는데, 세척과 용기에도 상당한 신경을 쓴다.

집밥의 대명사인 어머니의 밥은 어떨까. 성인이 된 이후 50여 년간 족히 5만4750번 이상의 밥을 지어왔을 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삼스레 별걸 다 묻는다던 어머니는 마침 ‘5만4751’번째의 지리멸렬한 저녁 밥상을 걷어내던 참이었다. “요즘이야 밥솥이 다 알아서 하지만, 촌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무쇠솥에 밥을 지었지. 보리 이삭 털고 나면 보릿짚을 땔감 삼고 겨울에는 솔가지로 불을 땠어. 별거 별거 다 땠지. 보리쌀은 먼저 삶아서 쌀하고 같이 섞어 밥을 했어. 밥물은 어떻게 맞추냐고? 쌀 위에 손을 요렇게 펼쳤을 때 다섯 손가락 바로 위까지 물이 찰박찰박 올라오면 적당한 거야. 그래 가지고 불을 확 때다가 끓어 오르면 불을 꺼내고 불기 없이 뜸을 들여야지. 그럼 자동적으로 밥이 되잖아? 나무 계속 때는 거 아냐. 은근하게 때야 하는 거니까. 그런데 사실 나는 결혼할 적에나 처음 해봤어. 그땐 맨날 놀았는데….” 그러니까 밥을 짓는다는 건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밥 소믈리에의 레시피가 생각난 김에 모처럼 정성껏 밥을 지어 보았다. 묵은 쌀 때문인지 오래된 전기밥솥이 문제인지 달착지근한 전문가의 밥맛과는 거리가 멀다.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깊은 맛도 부족하고 찰기며 풍미도 한참 모자라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뽀얀 쌀밥을 지을 줄 모르는 건 아직 좋은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직 나만을 위한 밥상 위에는 하얀 김만 무럭무럭 자란다. 올해는 제대로 된 밥을 지어 봐야겠다. 밥을 먹으며 ‘이건 일종의 밥값’이라고 생각했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