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패션스타 김칠두씨. 본업인 식당을 정리하고, 지난해 3월 63세의 나이에 모델로 데뷔했다. 사진 프리즘웍스
SNS 패션스타 김칠두씨. 본업인 식당을 정리하고, 지난해 3월 63세의 나이에 모델로 데뷔했다. 사진 프리즘웍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된다면, 백발을 휘날리며 런웨이에 등장한 이 새로운 패션 피플들을 주목하자. 요즘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은 김칠두다. 지난해 3월, 63세의 나이에 늦깎이 모델로 데뷔한 그는 1020세대가 열광하는 스트리트 브랜드의 모델이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스타다. 경기도에서 30년간 순댓국집을 운영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그가 어린시절의 꿈이었던 모델에 도전하게 된 건 본업이었던 식당을 정리한 후다. 생계를 위한 밥벌이에서 비로소 해방된 그는 딸의 적극적인 권유로 모델 에이전시에 등록했고, 서울패션위크 최초의 시니어 모델로 기록됐다.

‘Korea Grandma’라는 닉네임으로 유튜브를 주름잡고 있는 72세의 크리에이터 박막례 할머니가 할머니 특유의 차진 입담과 배꼽 잡는 유머 감각으로 젊은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김칠두는 오직 스타일로 승부한다. 깊은 주름과 흰 수염마저 근사한 패션 아이템처럼 보이는 그에겐 할아버지라는 수식어보다 국적 불문, 나이 미상의 ‘모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진정한 ‘꽃보다 할배’다.

최근의 현상처럼 보이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이 같은 붐이 일고 있었다. 본격적인 시작은 2017 F/W 베트멍 컬렉션이었다. 베트멍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는 밍크코트 차림의 우아한 백발 할머니를 쇼의 첫 번째 모델로 내세우며 파란을 일으켰다.

발렌시아가로 옮겨간 후엔 맨즈 컬렉션을 통해 신상 슈트를 입은 노신사들을 대거 등장시키기도 했다. 2017 S/S 보테가 베네타 쇼에서 ‘스트리트 패션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톱 모델 지지 하디드와 팔짱을 끼고 걸어나와 화제가 된 로렌 허튼은 라프 시몬스의 첫 번째 캘빈클라인 언더웨어 캠페인 모델로 발탁돼 칠순이 넘은 나이에 란제리 화보를 촬영하기도 했다.

한동안 유스 컬처(Youth Culture)에 빠져있던 명품 브랜드들의 시니어 모델 기용은 난데없는 해프닝이 아니다. 오버 사이즈 신상 코트와 가죽 팬츠를 입은 주름진 얼굴의 은발 모델들을 통해 이들 브랜드가 얻는 효과는 분명해 보인다. 그 누가 입어도 쿨할 수 있는 브랜드라는 것! 마케팅 업계에서는 문화와 여가를 즐기며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노년층을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라 부르며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19일 임종을 맞은 카를 라거펠트. 1983년부터 샤넬의 크레이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했다. 사진 블룸버그
지난 19일 임종을 맞은 카를 라거펠트. 1983년부터 샤넬의 크레이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했다. 사진 블룸버그

패션계 주름잡는 액티브 시니어

보다 중요한 건 이들이 소비 활동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선두에서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문화 생산자라는 사실이다. 2월 19일, 파리 패션위크를 일주일 앞두고 세상을 떠난 패션계의 제왕 카를 라거펠트의 나이는 85세였다. 본인은 1935년생 혹은 1938년생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사생활 침해로 법정 공방까지 오갔던 알리시아 드레이크의 책 ‘아름다운 가을’에 의하면 카를 라거펠트는 1933년 9월 10일 독일 함부르크 근교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983년부터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샤넬의 모든 디자인을 책임져온 그는 한때 파리 귀부인들의 옷장 속 골동품이 되어가던 트위드 재킷을 젊고 세련된 이미지로 탈바꿈시켰고, 화려한 종합예술의 장으로서 패션쇼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흰 머리 포니테일과 검은색 선글라스는 카를의 트레이드마크다. 높은 칼라가 달린 흰색 셔츠에 스키니진, 몸에 꼭 끼는 블레이저 차림으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그의 모습(이를 위해 그는 무려 92파운드, 약 41.7㎏의 체중을 감량한 바 있다)은 애완 고양이 슈페트와 함께 캐릭터화되어 전 세계 곳곳에 뿌려지기도 했다.

가끔은, 아니 종종 그는 “문신은 끔찍하다”는 식의 편협된 모습을 보이거나 여성의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으로 ‘꼰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샤넬의 매출은 더욱 치솟았다. 2017년 샤넬의 매출은 11% 늘어 26억9000만달러의 영업 이익을 기록했으며, 지난해엔 구찌보다 96억달러 높은 매출 실적을 올렸다.

“일을 그만두는 순간 죽는다”고 말할 정도로 일에 대한 높은 열정을 보인 그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디자이너들이 점점 더 빨라져 가는 패션 산업의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며 불평할 때조차 이를 기회로 삼았다.

2004년엔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대명사 H&M과 협업을 시도했으며 패션뿐만 아니라 화장품, 호텔, 자동차, 오토바이, 심지어 비디오 게임까지 디자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열 만큼 이름난 사진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며, 아이스크림 광고를 연출한 적도 있다.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그 모든 것을 패션으로 소화시켜온 그는 자신을 “구글 마인드가 있다”고 표현했다.

얼마 전 런던 웨스트민스터의 한 교회에서 2019 F/W 쇼를 선보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또 어떤가. 영국의 어린 학생들이 환경 문제에 대한 정부의 안일한 대처 방안에 항의하고자 평화 시위를 하는 동안 이 전설적인 펑크족 할머니는 자신의 쇼 무대에서 기후 변화 문제와 브렉시트, 부패한 정부를 비판하는 연설과 연극적 퍼포먼스를 펼쳤다.

95세의 나이에 꼼데가르송을 입고 영국판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의 커버 모델이 된 아이리스 아펠도 있다. 아이리스는 트루먼부터 케네디, 레이건, 클린턴 등 9명의 미국 대통령들이 머물던 백악관의 실내 디자인을 책임진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패션 아이콘이다. 그는 봉 마르셰 백화점과 컬래버레이션 전시를 열 만큼 건재하고, 그의 삶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리스’가 개봉되기도 했다.

무려 379만 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1928년생 소셜 스타 배디 윙클도 있다. 소녀 감성의 알록달록한 옷을 즐겨 입는 그는 ‘인스타그래머 오브 더 이어’로 선정되며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요즘 초등학생들도 따라 부른다는 김연자(그 역시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으로 환갑에 전성기를 맞이한 실버 가수다!)의 노래 ‘아모르파티’ 가사처럼 어쩌면 정말 ‘나이는 숫자’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패션계의 실버 파워 역시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뉴트로(newtro)의 한 현상일까.

SNS 시대의 트렌드와 결합하여 다시 한번 대중문화의 중심에 들어선 이 시니어 세대가 풍부한 연륜을 바탕으로 무엇을 만들어 낼지, 그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