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아이처럼 청춘물을 읽는 대신, 엄마는 딸의 청춘을 곁에서 살아낸다.
오래전 아이처럼 청춘물을 읽는 대신, 엄마는 딸의 청춘을 곁에서 살아낸다.

제일 처음 만화방에 간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이사를 했고 새 친구들을 사귀었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서가 아니라 선생님의 염려와 배려 속에서 억지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중 한 친구가 하굣길에 나를 불러서 말했다. “만화방 갈래?”

당시 유행하던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잡지는 언니를 따라 열심히 봤지만, 만화방에 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얼떨결에 따라간 그곳은 눅눅한 냄새와 구석에 모여 있는 남중생들의 불량한 느낌 때문인지 모든 것이 불길해 보였다. 무엇을 볼 거냐고 물어보는 친구에게, 불길함을 온몸으로 떨쳐내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로봇 태권브이와 깡통 로봇!”


만화 따라 그리며 그림 배워

마침 눈앞에 보이는 제목이었고, 유일하게 알고 있는 제목이기도 했다. 책을 집어 들어서는 구석에 자리를 틀고 읽는데,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친구보다 훨씬 빠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슬 걱정이 밀려왔다. 내가 서너 권을 보는 동안 친구는 한 권밖에 보지 못했다. 빨리 달린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그만큼 기름값이 더 든다는 걸 의미했다. 망설이다 마침내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다 본 다음에 서로 바꿔보자.”

그때였다. 탁 트인 실내에는 몇 개의 소파가 있었고 구석에는 작은 방 하나가 있었는데, 그 방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말했다. “꼬마야, 바꿔 보면 안 돼. 돈 내고 봐라.”

화들짝 놀라 방 쪽을 바라보니 아주머니 뒤편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같은 반 친구였다. 나중에 그녀는 내게 만화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함께 빌려 읽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귀띔해 주었다.

그때부터 만화방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나로서는 무궁무진한 학습의 기회이기도 했다. 만화를 잔뜩 빌려 읽고는 그림을 따라 그렸다. 작가마다 스타일이 있음을 깨닫고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작가 것만을 빌려 읽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만화 중 내게 유독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이혜순의 ‘핑크 드레스’.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상급생’ ‘하급생’ ‘은숙이’ 등이 있다. 만화가 이혜순은 ‘시대극+판타지’ 천지였던 당시 만화와는 다르게 현대(그래 봤자 교복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았으니, 작가는 우리 엄마 세대쯤 되지 않을까 싶다)를 배경으로 잔잔한 이야기를 선보였다. 여기서 잔잔하다고 함은 다른 만화들의 과도한 극적 흐름과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핑크 드레스’는 여느 만화와 달랐다. 미국의 현대를 배경으로 해, 고등학생들의 삶과 그들이 꾸리는 클럽 내부에서 벌어지는 다툼과 우정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다뤘다. 외화를 열심히 봤던 나에게는 익숙한 판타지였기에 더 설레고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이나 헌책방을 전전하며 오후를 보내던 나에게 반가운 사건이 벌어졌다. 동명의 소설을 발견한 것이었다. 앤 알렉산더라는 작가의 작품이었다. 소설 ‘핑크 드레스’를 완독하고 난 뒤 책의 뒷장에 실린 문고 작품 목록을 읽었다. 놀랍게도,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 같은 TV 영화 프로그램을 통해 접했던 제목들이 군데군데 찍혀 있었다. ‘슬픔은 그대 가슴에’ ‘슬픔이여 안녕’ ‘제복의 처녀’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 ‘내 청춘 마리안느’ 등등. 일본의 전집을 그대로 베껴냈을 것으로 추측되는 ‘레먼문고’는 그때부터 내 헌책방 레이더망에서 우선순위를 다투게 됐다.

방과 후면 레코드 가게를 거쳐 헌책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반복됐다. 비 오는 오후면 더욱 어두워진 헌책방 구석에서 눅눅한 책 냄새가 피어올랐다. 추리소설에 미쳐 지내던 꼬마가 그렇게 청춘물에 빠져들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그 시절도 막을 내렸지만.

내 손에 들어온 레먼문고 중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읽지 않고 버린 책이 한 권 있다. 그것도 우리 동네가 아닌 옆 동네까지 버스 타고 찾아가서 공터 쓰레기통에 버렸다. ‘파란 눈의 아가씨’라는 소설이다. 책 속에 나오는 편지가 문제였다. 파란 눈의 아가씨인 주인공과 하룻밤을 보낸 남자가 그녀에게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남자는 그녀의 가슴에 대한 예찬을 실어 놓았다. 그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그는 태연자약하게 내가 알고는 있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단어를 사용했다. 바로, 그 무시무시한 ‘유방’이라는 단어를. 혹시나 내가 이 책에 손을 댔다는 것을 누군가 알까 봐 겁이 났다.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버스에 올라 몇 정거장을 지난 뒤, 익숙한 얼굴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성 싶은 공터 쓰레기장에 책을 버렸다. 검은 구멍으로 떨어뜨린 책이 바닥에 안착하는 소리를 들은 후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집에 들어와서는 내내 그 책이 제대로 쓰레기차에 운반돼 남김없이 소각됐는지 걱정했다. 완전범죄는 없다 하였거늘, 과연 나는 금기의 단어를 눈으로 보고 읽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아직도 청춘 이야기에 설레

이십대 중후반을 보낸 프랑스 유학 시절, 부모님이 이사를 했다. 나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내 책과 레코드판을 모두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고물상에 팔아 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조금은 마음에 걸리셨는지, 부모님은 몇 십 권의 책은 남겨 두셨다. 샀으나 손도 안 댔던 법전과 몇 권의 낡은 책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은 내가 돌아온 탕아처럼 당신들 곁에 돌아와 눈물로 사죄할 날을 기다리셨던 걸까. “법학도의 길이 바로 제 길이었습니다”는 말을 혹시나 대비하셨던 걸까.

그 딸은 돌아온 탕아처럼 부모님 품에 안기기는커녕 느닷없이 결혼을 선포하고 미국으로 또다시 도망갔다. 몇 년 뒤 아버지는 미국을 방문하시며 책 두 권을 품고 오셨다. 보라색 포장지로 곱게 싼 ‘핑크 드레스’와 ‘겨울 해바라기’였다. ‘겨울 해바라기’란 책은 인상에 깊이 남아 있는 책이 아니었음에도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내게 다시 안착했다. 나머지 짐을 정리하면서, 그래도 옛 추억으로 한두 권쯤은 전해줘야 할 것 같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마도 누군가의 오랜 추억이었을 헌책 두 권이 그렇게 미국까지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미국의 청춘물을 읽던 꼬마 소녀는 이제 엄마가 됐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그녀의 두 딸은 이제 사춘기를 열렬히 보내는 중이다. 오래전 아이처럼 청춘물을 읽는 대신, 엄마는 딸들의 청춘을 곁에서 살아낸다. 마흔이 훌쩍 넘었는데도 청춘의 이야기에 설렌다는 건 딸들에겐 아직 비밀이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