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린 날의 호헨잘츠부르크.
비 내린 날의 호헨잘츠부르크.

마지막 여행지는 잘츠부르크였다. 오래된 부티크 호텔 방을 예약해 두었다. 기차역에 도착해 중앙에 설치된 발권기에서 표를 구입했는데 떠나는 시각은 물론 좌석까지 나와 있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안내소에 물어보니 오픈티켓(비지정석 표)이라며 바로 1 분 후 6번 승강장에서 잘츠부르크행 기차가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대로 짐을 끌고 잽싸게 기차역을 달렸다. 이제 막 움직이려는 기차에 겨우 올라탔는데 빈 좌석이 보이지 않아 결국 맨 끝 칸까지 꾸역꾸역 걸어가야만 했다.

기차역에 도착하니 택시는 보이지 않고, 결국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방으로 안내되는 도중 호텔 직원이 묻는다. 여행 일정은 세웠니? 아니, 그냥 갑자기 마음 바꿔서 온 거라서. 혹시 추천할 거라도 있니? 오늘 오후 지내고 내일 아침이면 떠나야 해. 잘츠부르크는 아주 작은 도시라서 두어 시간이면 걸어서 충분히 둘러볼 수 있어. 혹시 관심 있다면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에 참여해 보는 건 어때? 음, 그래? 너무 늦지 않을까? 몇 시간 걸리는데? 네 시간. 10분 후에 출발이야. 원한다면 픽업해 달라고 연락할 수 있어. 여섯 시쯤 끝나면 그때 도시를 구경해도 괜찮을 거야.

좋아. 그렇게 해 줘. 그대로 짐을 방에 내팽개치고 (방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천장이 높아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았고 운치 있게 낡은 가구들과 다르게 욕실은 제법 넓고 세련된 현대식이었다) 호텔 앞으로 나가 픽업 차량을 타고 투어가 시작되는 곳까지 갔다. 투어 도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 근처에 있는 몬세(Mondsee) 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리아와 트랩 대령의 웨딩 신이 촬영되었다는 생 미셸 성당을 방문하려던 참이었다. 잘츠부르크에 도착하니 비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보였다.

호헨잘츠부르크 요새를 방문하겠다는 마음으로 높은 절벽 위에 세워진 성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헤매면서 결국 도시의 주요한 관광지를 거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호헨잘츠부르크 요새에 도착하니, 궂은 날씨 때문에 성곽 전체가 텅 빈 기분이었다. 옛 도시의 성곽을 걸어 다니는 일은, 길을 잃은 듯 헤매는 일은, 시간을 잃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 안에 둥지를 틀고 있는 레스토랑도 기념품 가게도 문을 닫고 제 안으로 꼭꼭 움츠러든 그곳은 그야말로 세기를 짐작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때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몇 방울 떨어지던 것이 요새를 벗어날 무렵 세찬 빗줄기를 그리고 있었다. 푸른 돔이 있는 광장까지 내려오니 무서운 기세로 부서질 듯 쏟아지는 장대비에 우산을 쓰고 있는 것이 별 소용없이 느껴졌다. 혹시나 가방에 집어넣은 소형 우산은 이미 여러 군데 작은 구멍을 상흔처럼 안고 있었고 그사이로 물기를 그대로 싸버리듯 뿜어대고 있었다. 어느새 몸이 축축하게 젖어서 희미한 김이 오르고 운동화는 옛 도시의 돌길에 고인 빗물로 잔뜩 무거워졌다. 그래도 무작정 걸었다. 요새에 이르렀을 때 지기 시작한 하늘은 이미 어둑해졌다. 어둠은 비처럼 신선했으나 차가웠다. 나를 숨겨주되 따사로이 품어주지는 않는, 부드럽지 않은 밤 그러나 여전히 매혹적인 밤.

골목 골목을 지나 강을 건너고 전망이 훌륭하다는 어느 호텔의 바에 올랐다. 테라스는 이미 문을 닫았지만 시야가 넓은 창문을 통해 비에 젖은 도시의 전망이 펼쳐졌다. 모엣 샹동 로제 샴페인 한 잔을 그렇게 마시고 바를 나왔다. 비 오는 날은 샴페인이 좋다. 기포가 입안에서 터져 내부로 흘러 들어가는 느낌이 어쩐지 비가 쏟아지는 기세와 닮았다. 속절없이 부서지는 장렬함, 그를 남김없이 들이켜는 것은 잔인한 권력, 종국에는 우스꽝스러운 허세. 연극을 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면, 나는 내가 좀 더 견딜 만하다고 느낀다. 물론 파열의 에너지는 오래 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순간을 지나가게 해 주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감사하랴.

이윽고 지나가는 골목의 한 어귀, 북적이는 이탈리안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생맥주 한 잔 들이켜며 소스가 걸쭉하고 든든한 파스타를 먹는다. 양이 꽤 되었는데 나는 그 많은 것을 다 먹어 치울 기세다. 저 멀리 바에 앉아 있는 남자의 시선이 자꾸 내게 머물고 있다는 걸 알지만, 난 결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을 셈이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허공, 허공을 떠도는 사람들의 이미지, 뒤돌아서면 내 머릿속에서는 빗방울처럼 터지고 말, 당신은 수십 년을 살겠지만, 나의 기억은 몇 초도 그대에게 머물지 않을 게다. 이 얼마나 뻔뻔한 당당함인가. 삶을 사는 것은 무릇 이렇게 괘씸한 거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당신 아닌 허공

식삿값을 치르고, 과객이 여행길에 들른 주막에 호기롭게 엽전을 내밀듯 나는 내게는 여전히 낯설기만 한 외국의 돈을 남긴다. 호텔에 도착해 욕탕에 물을 받는다. 거품을 듬뿍 만들었다. 반은 기포고 반은 뜨거운 물 안으로 머리까지 푹 담가 버린다. 물은 무거워서 내려가고 기포는 가벼워서 자꾸 솟는다. 그들은 각각 나를 위로 아래로 당기는데 참으로 그럴듯한 조화다. 한기에 굳어버린 근육들이 차츰 헐거워지고, 아아, 오랜만에 쏟아지는 졸음. 오래된 피로, 아득한 곳에서 밀려오는 중세의 기억 같은 잠. 침대에 아직 마르지 않은 몸을 뉜다. 이대로 잠이 들 것이다. 기세등등한 잠, 뻔뻔한 잠, 불안도 기쁨도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거침없는 잠, 그토록 원했지만 오지 않았던 잠이 비로소 나를 싣고 어디론가 흘러갈 태세다.

고마워라. 이대로 파열되어도 단 한숨 달게 잘 수 있다면. 그리고 나는 거짓말처럼, 길고 무심한 잠을 잤다. 문득, 알 수 없는 의식처럼 계절을 떠나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잔인한 계절은, 끝이 없던 싸움은 지나갔다. 평온함을 가장한 채 살았던 그날들을 단단한 잠과 함께 빠져나온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뜨겁고 가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다. 당신의 행복이 사실은 권태라고 찌르는, 비수 같은 이야기를. 각진 퇴폐와 그 어둡지만 찬란한 빛깔을 양탄자처럼 펼쳐서, 고요한 격정과 부드러운 추락을 받아내는 서사의 탄력과 그 뜨거운 솟음을 상상한다. 그리고 나는 꿈속에서 편지를 썼다.

“다른 사람들과 있으면 내가 낯설고 버거워. 그런데 당신과 있으면 내가 나인 게 편안해. 메릴린 먼로가 남긴 메모 중 이런 내용이 있어(좋아하는 친구가 몇 년 전 여름에 보내준 구절이야). 인간이 다른 사람을 만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타인과 나눌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다고. 그래서 우리는 아주 고독한 부분으로 가득한 존재라고. 그런데 말이야, 나는 당신의 그 고독한 전체가 잡힐 듯이 보여. 탐정처럼 추적하지 않아도 눈앞에 현현하듯 드러나, 그래서 당신 앞에서는 외롭지가 않아. 나의 고독이랑 당신의 고독이 함께 있는 것 같아서.”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