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마 다카시의 사진집 ‘흔적’ 속 사진. 하얀 눈 위에 흩뿌려진 붉은 피와 검정 나뭇가지로 사슴의 죽음을 표현했다. 사진 김진영
혼마 다카시의 사진집 ‘흔적’ 속 사진. 하얀 눈 위에 흩뿌려진 붉은 피와 검정 나뭇가지로 사슴의 죽음을 표현했다. 사진 김진영

동물이나 식물의 개체 수가 평균 이상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은 인간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인간이 만든 도로로 인해 이동이 막히고 식량 확보가 어려워진 동물의 개체 수는 감소한다. 인간이 외국에서 수입한 동식물 때문에 토착 생태계가 교란되기도 한다.

개체 수가 급증한 동식물은 공포감을 자아낸다. 일본 사진가 미즈타니 요시노리는 도쿄에서 본 라임색 앵무새를 촬영한 ‘도쿄 앵무새(Tokyo Parrots·2003)’ 시리즈로 잘 알려진 작가다. 그는 도쿄 세타가야 지역에 위치한 본인의 집 근처에서 우연히 라임색 앵무새를 봤다. 시간이 지나자 라임색 앵무새는 수백 마리로 늘었다. 그는 수많은 앵무새가 나무 위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새(The Birds·1963)’를 본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는 이 모습을 화면 가득 담아냈다. 많은 수의 동식물이 모여 있는 장면은 그 자체로 시각적 힘을 갖는데, 거기에 앵무새가 라임색이기까지 한 ‘도쿄 앵무새’ 시리즈는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일본 사진 작가 혼마 다카시는 이와 비슷한 현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혼마 다카시는 1962년생 중견작가다. 그는 도쿄의 외곽을 중심으로 도시와 자연의 모습을 담은 ‘도쿄 교외(Tokyo Suburbia· 1998)’, 후쿠시마에서 방사능에 노출된 숲속 버섯을 담은 ‘숲에서 온 버섯들(Mushrooms From The Forest·2011)’, 여러 도시의 모습을 탐구한 ‘나르시시즘적 도시(The Narcissistic City·2016)’ 등을 작업했다. 그는 작품별로 거리 사진의 전통을 따르거나 정물 사진 촬영 방식을 사용하는 등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였다.

혼마 다카시는 가장 최근 출간한 사진집 ‘흔적(Trails·2019)’에서 다큐멘터리 사진 같으면서도 아닌 듯한 독특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사진집 ‘흔적’의 소재는 일본 홋카이도의 시레토코 국립 공원에서 개체 수가 급증한 사슴이다. 이 공원은 사슴의 수를 줄이기 위해 공원 내 특정 지역에서 사슴 사냥을 합법화했다. 지역 사냥꾼들에게 사슴 사냥을 허용한 것이다. 인간과 야생 동물의 관계에 관심이 있던 혼마 다카시는 사슴 사냥에 관한 기사를 우연히 접한 후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는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 동안 사냥꾼 무리를 따라 겨울 산을 올랐다. 그렇게 공원 곳곳에서 사슴이 남긴 피의 흔적을 기록했다.


혼마 다카시의 사진집 ‘흔적’ 표지. 구멍이 뚫려 있다. 사진 김진영
혼마 다카시의 사진집 ‘흔적’ 표지. 구멍이 뚫려 있다. 사진 김진영
혼마 다카시가 ‘흔적’ 속 사진을 추상화로 그린 그림. 사진 김진영
혼마 다카시가 ‘흔적’ 속 사진을 추상화로 그린 그림. 사진 김진영

이 사진집은 세 가지 흥미로운 요소를 갖고 있다. 첫째, 사슴을 주제로 하지만 사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사슴 무리나 총에 맞고 달려가는 사슴의 모습을 담았다면 시각적으로 충격을 주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집은 초반부에 평화로운 사슴의 모습을 한 번 보여준 뒤, 마지막에 가서야 총에 맞아 계곡에 떠 있는 사슴의 사체를 작게 담았다. 그 외에는 사슴의 죽음을 암시하는 피의 흔적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이 흔적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숲에 직선 방향으로 흩뿌려진 피는 총에 맞아 비틀거리며 달렸을 사슴의 모습을, 계곡 끝에서 끊어진 핏자국은 끝내 계곡에 떨어져 죽음을 맞이했을 사슴을 떠올리게 한다.

둘째, 사진이 추상적이다. 흩뿌려진 붉은 피, 검정 나뭇가지, 하얀 눈을 담은 사진은 분명 혼마 다카시가 본 장면을 구체적으로 재현한다. 그런데 각각의 요소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피가 점의 역할을, 나뭇가지가 선의 역할을, 눈이 면의 역할을 한다. 마치 점·선·면이라는 요소로만 사진을 구성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시각적 효과를 주기 위해 혼마 다카시가 겨울을 택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셋째, 표지가 사진집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표지에는 혼마 다카시의 사진을 배경으로 총알 자국을 연상시키는 붉은 점이 찍혀 있다. 혼마 다카시는 표지 작업을 위해 사냥꾼이 자신의 사진에 총을 쏘도록 했다. 표지를 자세히 보면 붉은 지점 주변에는 탄환이 종이를 뚫고 지나가면서 남긴 금이 보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표지에 실제로 구멍이 뚫려 있다는 점이다. 표지를 살짝 들어 올리면 구멍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고, 붉은색은 표지 다음 장에 사용된 붉은 종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차원의 평면적인 표지를 들추는 순간 3차원의 깊이감이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총알은 표지 표면에 상흔을 남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의 표지가 그러하듯 사슴의 몸을 뚫고 들어갔을 것이다.

혼마 다카시의 사진집 ‘흔적’은 사회의 단면을 사회 고발적인 시선이 아니라 예술 프로젝트의 관점에서 다룬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사슴 사냥이라는 주제는 분명 동물 보호와 관련해 첨예한 논쟁을 촉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마 다카시는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대안적 다큐멘터리’라고 지칭한다. 보는 이들에게 판단을 남겨두고 자기 뜻은 명료하지 않게 보여주는 것, 이것이 그의 방식이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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