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얀 드 노이가 아흔아홉 가지로 변주하기로 한 한 장의 사진. 사진 김진영
아르얀 드 노이가 아흔아홉 가지로 변주하기로 한 한 장의 사진. 사진 김진영

소설, 영화, 사진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우리는 종종 줄거리나 내용에 초점을 두지 않는 작품을 만나곤 한다. 장르의 형식을 실험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작업 말이다. 처음에는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 목표를 알게 되면 흥미롭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 작가 아르얀 드 노이(Arjan de Nooy)는 전통적인 사진의 문법을 따르기보다, 사진이라는 매체에 질문을 던지고 실험하는 작가다.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 학구적인 태도로 임한다는 점에서, 나의 접근은 언제나 어느 정도 과학적인 측면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작업은 사진의 ‘표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에 대해 ‘깊숙이’ 생각하도록 감상자를 이끈다.

아르얀 드 노이의 사진집 ‘99:1’ 역시 그러하다. 다채로운 아흔아홉 가지의 이미지가 담겨 있는 이 책은 통상 사진집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를테면 한 가지 주제나 장르의 사진이 통일성 있게 담겨 있는 사진집과 거리가 멀다. 모두 다른 작가의 사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상이한 이미지가 책에 산재해 있다. 이 책은 무엇에 관한 걸까?

이 책은 1947년에 출간된 프랑스 소설가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의 ‘문체 연습(Exercices de style)’에서 영감받아 만들어졌다. 레이몽 크노의 ‘문체 연습’은 한 가지의 짧은 사건을 아흔아홉 가지 문체로 변주해 써 내려간 책이다.

사건은 이렇다. 버스 안에서 페도라를 쓴 한 남자가 다른 승객이 자신을 밀쳤다며 비난한다. 곧 빈자리가 생겨 페도라를 쓴 남자는 자리에 앉는다. 이 남자는 잠시 후 생 라자르 역에서 친구를 만나는데, 그 친구는 이 남자에게 코트에 단추를 하나 더 달라고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이게 전부이다.

레이몽 크노는 이 짤막한 이야기를 아흔아홉 가지 문체로 다시 쓴다. 현재, 완료된 과거, 진행 중인 과거 등 시제를 바꾸기도 하고 편지, 찬가, 광고, 전보, 연설 등 형식을 바꾸기도 하며 은유법, 철자 바꾸기 놀이, 중복하여 말하기 등을 시도하기도 한다. 다양하게 변주된 글을 읽으며 독자는 동일한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통해 레이몽 크노는 문체가 불투명하다는 점, 즉 문체는 투명하게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야기가 문체보다 우선한다는 고정관념을 뒤엎고, 어떤 이야기인지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르얀 드 노이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했다.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는가, 그리고 그것이 현실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를 사진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레이몽 크노의 문학 실험에 상응하는 사진 실험을 해 볼 수 있진 않을까?

특히나 사진은 통상 현실을 담는 투명한 거울로 생각되곤 한다. 작가의 의도나 선택에 따라 사진에 현실이 변형되어 담기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사진을 보며 이것이 현실의 무엇을 가리키는지, 카메라 앞에 있었던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니 말이다.

아르얀 드 노이는 자신이 찍은 사진 가운데, 레이몽 크노의 ‘문체 연습’의 사건과 나름의 유사점이 있는 사진 한 장을 골랐다. 그것은 2007년 파리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오른편에 버스가 정차해 있고 왼편에는 두 남자가 걸어간다. 중앙의 가로등에는 교통표지판 여러 개가 붙어 있고, 뒤로는 울창한 나무들이 보인다. 이 한 장의 사진 ‘표면’에 담긴 사건은 이게 전부다.

그는 이 사진 한 장으로부터, 정확히 말하면 네거티브 필름 하나로부터 자르고 찢고 접고 결합하고 프린트하고 복사하고 재촬영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아흔아홉 가지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교통표지판 이미지, 풍경 사진, 퍼즐, 3D 이미지, 스크린샷, 폴라로이드를 비롯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리처드 애버던, 만 레이, 데이비드 호크니, 탈보트 등 유명 작가의 스타일을 차용해 만든 이미지까지 어떤 것도 서로 유사해 보이지 않는 사진을 변주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레이몽 크노가 각 문체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아르얀 드 노이도 ‘이미지의 문체’에 각각 이름을 붙여 총 99항목으로 이루어진 목차를 완성한다. ‘99:1’은 이러한 이미지 실험을 담고 있다.


아르얀 드 노이의 책, ‘99:1’의 표지. 사진 김진영
아르얀 드 노이의 책, ‘99:1’의 표지. 사진 김진영
49번째로 변주한 추상표현사진 이미지. 사진 김진영
49번째로 변주한 추상표현사진 이미지. 사진 김진영

사진은 현실의 창 아닌 이미지에 불과

아르얀 드 노이의 이런 작업은 ‘사진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통상적인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흔아홉 가지로 변주된 이미지는 하나의 장면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그에 따라 독자는 자연스레 사진을 바라보던 기존 방식, 그러니까 이 이미지를 파생시킨 하나의 절대적인 사건을 찾으려는 방식이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사진이 가리키는 현실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것은 의미 있는 것일까? 아흔아홉 가지의 상이한 이미지가 하나의 현실을 재현한다고 볼 수 있을까? 이미지는 현실을 인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99 : 1’은 사진 매체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도록 독자를 이끈다.

이는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가 던졌던 질문과 맞닿아 있다. 롤랑 바르트, 수전 손태그 등 많은 사진 이론가가 사진이 현실과 맺는 관계에 주목했다. 이와 달리 빌렘 플루서는 사진 제작 과정에 주목했고, 거칠게 말하면 사진이 현실과 얼마나 밀접한 것인지가 아니라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사진에 담긴 것은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온 장면이다. 카메라가 허용하는 가능성 안에서 생산된 사진은 현실을 비추는 투명한 봉투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을 가리는 일종의 가림막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진이 세계를 투명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흐릿하게 보여준다는 점을 망각한다. 대신에 흐릿한 사진을 세계 자체가 반영된 것이라고 곧잘 믿어버린다. 이미지가 현실로 여겨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빌렘 플루서는 이를 이미지 숭배(idolâtrie)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사진과 같은 ‘기술 이미지(technical image)는 창문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것’을 강조한다.

아르얀 드 노이의 ‘99:1’은 사진이 어떠한 방식으로 세계를 흐릿하게 막는 ‘스크린’이 될 수 있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현실로부터 떨어져나와, 현실과 연결고리가 매우 희박한 장면들을 나열함으로써 말이다.

사진을 볼 때, 보이는 방식보다도 벌어졌던 현실을 우선한다고 여기는 관념, 그래서 사진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창으로 생각하던 독자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레이몽 크노가 ‘문체 연습’에서 문체는 투명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 것처럼, 아르얀 드 노이 역시 이미지의 문법 자체가 현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