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라는 말을 들으면 달콤 쌉싸래한 연애소설이 떠오른다. 몸을 포갠 남녀가 한창 피어 흐드러진 동백꽃 속으로 파묻히는 마지막 장면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수없이 반복되며 사랑의 이미지로 되풀이됐기 때문일까. 두 사람이 꽃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카메라는 으레 하늘이나 허공을 가리키며 우리가 품고 있는 사랑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화면이 공간을 비추면 우리 마음의 스크린에도 불이 켜진다. 사랑의 장소는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다. 이를테면 동백꽃 흐드러지게 핀 꽃밭 같은 곳. 오가는 사람 없는 한적한 골목 같은 곳. 나의 스크린에도 내가 지나온 사랑의 장소들이 스쳐 지나간다.

가을이 돼서 그런가. 소셜미디어(SNS)에 꽃밭에서 찍은 사진들이 즐비하게 올라온다. 가을이 돌아올 때마다 비슷한 풍경을 보고 처음 본 것처럼 놀라지만 놀란 다음에는 이내 조금 쓸쓸해진다.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에 꽃과 바람만 덩그러니 남은 풍경이 왜인지 적막해 보여서다. 풍경에 대해서라면 늘 완전히 좋아하진 못했다. 풍경이 곧 배경은 아닐 텐데 풍경이라고 하면 배경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라면 심각한 편견이겠다. 풍경을 편안하게 좋아하지 못하는 건 누군가의 배경이 될까 봐, 그러니까 남은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내 마음의 진심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한 내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내게 어른이란 배경이 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남은 쪽이 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상태의 다른 말이니까.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동백꽃’에서 꽃밭이라는 풍경은 뒤에 있거나 남은 배경이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인 동시에 현실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하는 위험한 배경이다. 맨 뒷자리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악의 구조를 장악한 사람처럼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로맨틱하고 아름답지만, 그 안에 차가운 냉소를 숨기고 있다. 나는 풍경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풍경을 200% 활용하며 기대를 배반하거나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숨겨 두는 엔딩, 그러니까 바로 이런 마무리만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좋아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느낌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것이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 소설을 기억할 것이다. 풍경은 직접 말하지 않으므로.


동백꽃이 가득한 곳에 낭만은 없다

‘동백꽃’은 낭만적인 연애소설이 아니다. 열일곱 살 동갑내기인 점순이와 ‘나’의 투덕거림은 점순이 입장에서 보면 밀고 당기는 연애담일지 모르지만, 나의 입장에서 보면 반항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 일방적인 괴롭힘일 뿐이다. 점순이네 집은 마름이고 내 집은 점순이네 집에 땅을 부쳐 먹는 기울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는 일찍부터 단단히 일러두었다. 행여라도 점순이와 말이 나는 관계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세계에서 예감이 낭비되는 법은 없다. 수작과 괴롭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점순의 도발이 계속되자 나는 반격을 도모한다. 그것이 더 큰 굴레가 될 줄도 모르고.

동백꽃밭으로 폭삭 엎어진 두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모르긴 해도 점순이가 앞장서고 나는 뒤따르는 관계가 쉬이 끊어졌을 것 같지는 않다. 말했듯이 소설의 세계에선 예감이 낭비되지 않고, 그들이 사는 세계는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길목을 계급이라는 존재가 막아서고 있는 가혹한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을 막아선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했는지, 가만히 두면 좋아하게 됐을지, 이 짧은 소설의 이야기만으로는 다 알 수 없다.

“느 집엔 이거 없지?” “얘! 너 배냇병신이지?” “느 아버지가 고자라지?”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으면서도 대거리 한 번 못하는 게 분하지만 그래 봤자 나는 분함의 눈물만 머금을 수 있을 뿐이다. 점순이는 툭하면 저희 집 수탉을 몰고 와서 내 집 수탉과 싸움을 붙인다. 험상궂게 생긴 자기네 닭이 이길 줄 뻔히 알고 하는 짓이다. 고추장을 먹인 닭은 병든 황소가 살모사를 먹고 용을 쓰는 것처럼 기운이 뻗친다는 얘기도 ‘동백꽃’을 읽으며 알았다. 낭만적인 엔딩부터 기억나는 소설이지만 나는 동백꽃이란 말을 들으면 혈흔이 낭자한 닭싸움부터 떠올린다. 말했듯이 이것은 한쪽에서 보면 연애 서사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폭력이기도 하니까.

실컷 괴롭힘을 당하다 열이 받은 나머지 한 번 반격했을 뿐인데 점순이의 닭이 죽어 버렸고, 이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가 약점이 되어 나는 한층 더 점순이에게 끌려가는 상황이 된다. 나의 처지에서 보면 점순을 향한 한 번의 반격이 더는 아무런 반격도 할 수 없는 빌미가 된 것이다. 그러니 동백꽃 속으로 파묻힐 때 드러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사랑의 전류가 아니라 나의 저항과 반항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던 탄성의 소멸이겠다. 동백꽃으로 가득한 곳은 사랑의 장소이기보다 은폐의 장소에 가깝다. 그렇게 생각하자 낭만적인 풍경은 사라지고 차가운 배경만 남는다. 사랑이 지닌 가장 큰 힘이라면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것일 테다. 변화가 예정돼 있지 않다면 두 사람 사이에 차라리 사랑이 없었기를. 피어날 수 없는 꽃은 생각만 해도 너무 슬프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김유정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보(徽文高 普)를 거쳐 연희전문(延禧專門) 문과를 중퇴하고 한때 충남 예산 등지의 금광을 다니기도 했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에, ‘노다지’가 중외일보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구인회 동인으로 참여했다. 폐결핵에 시달렸던 김유정은 스물아홉을 일기로 요절하기까지 불과 2년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에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겼다. 데뷔작인 ‘소낙비’를 비롯해 김유정의 작품은 대부분 농촌을 배경으로 한다. ‘금 따는 콩밭’은 노다지를 찾으려고 콩밭을 파헤치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그린 작품이고 ‘봄봄’은 머슴인 데릴사위와 장인 사이의 희극적인 갈등을 소박하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그린 그의 대표적인 농촌소설이다. 그 밖에 ‘동백꽃’ ‘따라지’ 등의 단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