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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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에서 네덜란드로 향하는 기차 안이다. 바캉스 시즌이라 그런지 기차 안은 승객들로 가득 찼다. 연일 폭염 경보를 알릴 정도로 무더운 날씨임에도 실내 온도 제한으로 에어컨도 영 시원하지 않아 마치 사우나를 방불케 한다. 이 와중에 기차가 중간에 멈춘다. 승무원이 방송하길 냉방 장치가 고장 났다고 한다. 곧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기차 안은 더 더워지고 습해진다. 이윽고 필자 뒤에 앉은 아이들이 울기 시작한다. 한 아이가 우니 곧 객차 안에 존재도 모르게 조용히 있던 아이들 모두가 따라서 운다. 모두의 인내가 점차 한계를 향해 가는 중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필자는 ‘왜 저 아이들은 우는 걸까. 조금 조용히 할 순 없을까’ 하며 의아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두 아이를 연달아 출산해서 고군분투하는 여동생과 그 애기들을 지켜보면서 이젠 이렇게 우는 아이들을 보면 불쌍하기도, 안타깝기도 하고 또 그들의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까 연민을 느끼곤 한다.

필자도 분명히 그와 같은 어린아이의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 귀에다 대고 실컷 목청 높여 울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 한다는 속담처럼 본인이 그랬던 사실을 잊어버리고 아이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성인이 돼 있지 않은가.

서론이 길어졌다. 필자는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의 피아노과 교수와 일정이 있어 네덜란드로 향하는 중이다. 곧 독일의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작품으로 독주회를 할 예정인데, 그의 작품 중 ‘어린이의 정경’이라는 작품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모차르트 및 슈만 등 고전, 낭만 시대의 악기와 작품 연구로 유명한 한 교수에게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다.

어린이의 정경은 로베르트 슈만이 1838년경 작곡한 작품으로 13개의 소품으로 이뤄진 곡이다. 그중 7번째 곡인 ‘트로이메라이’는 영화, 드라마 등에도 많이 삽입돼 클래식 음악과 친숙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소위 말해 슈만의 히트곡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린이의 정경을 이루는 이 13개의 소품은 각각 재미있는 이름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 ‘목마의 기사’ ‘술래잡기’ 등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하는 제목부터 ‘꿈’ ‘조용히 잠든 아이’ ‘너무 심각한 것 같은’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듯한 제목까지 다양하다.

이런 재미있는 부제와는 별개로 막상 이 작품들을 연주하는 과정은 어렵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의 초판본에는 ‘낮은 난도의 곡’이라고 적혀 있어 이 곡을 연습하며 고군분투하는 필자 및 많은 전공자를 실소케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어려움은 바로 음악 본질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슈만 본인의 언급대로 이 작품은 어린이나 초보자를 위한 음악이 아닌 어른이 바라보는 어린이의 정경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것이라고 비유해 볼 수도 있겠다.

어렸을 때 나는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고 표현했을까. 어린아이였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뿌연 연기에 휩싸인 몇몇 장면이 떠오를 뿐이다. 물론 슬프고 기뻤던 기억도 있지만 이제는 너무 먼 옛날의 일이 돼 버렸기에 이제는 나 자신 고유의 감정이라기보다는 타인의 감정과도 같이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런 상태에서 나는 음악으로 무엇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슈만은 작곡 당시 그의 연인 클라라 비크에게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내가 작곡한 작품은 당신이 내게 한 말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일전에 내가 어린아이같이 군다고 말한 적이 있죠. 맞아요, 나는 마치 그때 아이들이나 입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던 게 틀림이 없어요. 나는 서른 개의 우스꽝스러운 곡에서 13곡을 추려 ‘어린이의 정경’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당신도 기뻐할 거예요.”

그의 이 편지 구절에서 흥미로운 점은 슈만은 어린아이의 감정을 묘사했다기보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보이는 순수하고 순진한 한 인간의 감정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슈만이 살던 낭만주의 시대에서 어린아이라는 단어는 어린이를 지칭하는 것뿐만 아닌 성인이 느끼는 것의 반대를 의미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성인이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혼돈, 어려움과는 정반대의 세상 말이다.

동시대 예술인들이 이와 관련해 남긴 글들이 있는데, 시인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카멜레온 색에 빠져들지 않는 한, 어린이야말로 숭고함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고, 작곡가 슈만 본인도 “모든 아이에게는 각각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심연이 자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낭만주의 시대 화가 오토 룽에 또한 “(예술에 있어) 최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어린이가 돼야 한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이 어린이의 정경에서 슈만은 어린이의 감정 또는 어린아이 같은 감정을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우리 어른들도 어린아이 못지않게 최상의 맑고 순수한 감정을 이 음악을 통해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돼서 사회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종종 원하지 않은 옷을 입어야 할 때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경우가 그래야 하는 경우보다 훨씬 더 많아진다. 말도 자신의 감정을 담기 이전에 수많은 상황을 생각하고 판단해서 말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필자의 경우 종종 어떤 감정이 오롯이 내 것인지 모르며 살 때가 많다. 그렇기에 초견으로도 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적으로 간단한 곡이 이리도 표현이 어려웠던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기차는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필자는 헤이그 왕립음악원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을 만나 어린이의 정경을 연주해 본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 피아노가 아닌 슈만이 살던 시대에 제작된 1840년도 프랑스 산 에라르(Érard) 피아노로 연주해본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정경이 1838년 작품이니 이 둘의 나이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슈만도 이 악기를 살아생전에 알았을 것이니, 이 악기의 소리를 빌려 그의 순수한 마음에 다가가 본다.



▒ 안종도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연주학 박사, 전 함부르크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슈만 
어린이의 정경, 작품번호 15
피아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어린이의 정경은 현재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낭만주의 시대 피아노 작품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널리 사랑 받는 작품이다. 그만큼 연주되는 경우 또한 많다.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연주로 소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