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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한 봄날, 낮술에 취했다가 깨어난 이백(李白)이 다음과 같이 읊었다. ‘춘일취기언지(春日醉起言志·봄날 술 깨어 뜻을 적다)’라는 시다.

“세상살이 큰 꿈 같으니, 어찌 이 내 삶 힘들게 하리! 그래서 종일 취해, 앞 기둥 밑에 누웠네. 깨어나 뜰 앞 바라보니, 새 한 마리 꽃 사이에서 운다. 지금이 어느 때인고 물음에, 봄바람이 날아다니는 꾀꼬리에게 속삭인다. 이를 보고 탄식하며, 술 대하자 또 홀로 기울인다. 소리 높여 노래 불러 밝은 달 기다리다, 곡조 다하자 정은 이미 잊었어라(處世若大夢, 胡爲勞其生! 所以終日醉, 頹然臥前楹. 覺來眄庭前, 一鳥花間鳴. 借問此何時, 春風語流鶯. 感之欲歎息, 對酒還自傾. 浩歌待明月, 曲盡已忘情)!”

주당에게는 늘 핑계가 있다. 이백의 가장 큰 핑계는 ‘인생이 꿈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꿈같은 인생을 설사 백 년이나 산다 해도 그는 “삼만육천일을 밤마다 촛불 잡아야 하네(三萬六千日, 夜夜當秉燭)”라고 떠벌인다.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라는 글에서도 “덧없는 삶 꿈같은데, 즐길 때는 얼마던가? 옛사람이 촛불 잡고 밤까지 놀았다더니, 실로 까닭 있는 말이로다(浮生若夢, 爲歡幾何? 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라고 그 뜻을 거듭 밝혔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예부터 성현은 모두 쓸쓸한데, 오직 마시는 자만이 그 이름을 남겼다(古來聖賢皆寂寞, 唯有飲者留其名)”라는 맹랑(孟浪)한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늘의 별보다 많은 인생이 스쳐 지나간 오랜 세월 속에서 어찌 이백만 이렇게 생각했겠는가. 후한(後漢) 때의 작품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에는 그 원형이 보인다. “사는 해는 백도 채우지 못하는데, 언제나 천 년의 근심을 품고 있구나. 낮은 짧고 밤이 길어 괴로우니, 어찌 촛불 잡고 놀지 않겠나? 즐기기란 때맞춰 할진대, 어찌 앞날을 기다릴 텐가(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晝短苦夜長, 何不秉燭遊? 爲樂當及時, 何能待來兹)?”

저명 시인 조조(曹操)도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술 마주하면 노래할지니, 인생이 얼마던가? 마치 아침 이슬과도 같이, 지나간 날이 너무나 많구나! 아쉬움에 내 마음 출렁거려, 솟아나는 근심 잊을 수가 없도다. 이 근심 어찌 풀까 하니, 그저 저 술뿐이어라(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慨當以慷, 憂思難忘. 何以解憂, 唯有杜康).” ‘단가행(短歌行)’이라는 장시의 첫머리다.

이러한 정서를 두고 흔히 ‘급시행락(及時行樂·제때에 즐김)’이라 한다. 심지어 평생 ‘나라에 충성하고 사회와 대중을 걱정한’ 두보(杜甫)조차도 이따금 “몸 밖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일 생각 말고, 그저 생전의 한정된 잔이나 다하세(莫思身外無窮事, 且盡生前有限杯)”라고 말할 때가 있었다. 물론 앞의 경우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그만큼 인생살이는 고달프고 힘들어서 살아내기가 쉽지 않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삶이 짧고 덧없다는 인생관은 특히 당(唐)나라 때 하나의 유행을 이루었다. 수많은 시문이 이를 말해주고 있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전기(傳奇·기이한 이야기를 전함)’라는 장르의 단편소설 두 편이다. 이공좌(李公佐)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과 심기제(沈旣濟)의 ‘침중기(枕中記)’다. 전자는 순우분(淳于棼)이 큰 홰나무의 남쪽 가지 밑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깨어난다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의 출전(出典)이다. 이야기는 그 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은 주인공이 도교(道敎)에 귀의, 초연하게 살다가 삶을 마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침중기’는 초라한 행색의 젊은 노생(盧生)이 한단(邯鄲)의 한 객점에서 도사 여옹(呂翁)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생이 출세 못 한 자신의 고달픈 처지를 하소연하며 사는 즐거움이 없다고 푸념하자, 여옹은 속이 빈 청자 베개를 건넨다. 마침 졸렸던 노생은 베개를 베고 누웠다가 베개 구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난 그는 그렇게 갈망하던 고관대작을 얻었다. 중간에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많은 자손을 두고 80세 넘어서까지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에게 여옹이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해야 이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잠들기 전에 주방에서 찌고 있던 기장밥은 아직도 익지 않았다. 노생은 꿈을 통해 일깨워준 여옹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작별을 고했다. 인생의 덧없음을 이르는 ‘황량몽(黃粱夢)’이나 ‘한단지몽(邯鄲之夢)’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인생이 아무리 덧없고 짧다고 해도 하루하루 새로운 날과 마주쳐야 하는 현실을 피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시름을 잊으려고 술과 놀이로 달래기도 하지만, 곧 전과 같이 냉정한 현실을 맞이해야 한다.

천하의 이백도 이에는 별수 없었다. 공명과 영화를 구하기 위해 그 또한 평생 노심초사했다. 젊은 시절 벼슬을 얻으려고 각지를 떠돌며 자신을 추천해 줄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찾아다녔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천(四川)에서는 이옹(李邕)에게 홀대당하자 자신의 재능을 몰라준다고 원망하는 시를 보내기도 했다. 또 ‘상한형주서(上韓荊州書)’라는 편지에서는 형주의 장관인 한조종(韓朝宗)을 주공(周公)의 풍모와 인품을 갖춘 당대 최고의 명망가라며 비굴할 정도로 추켜세웠다. 40세가 넘어서 장안(長安)에 간 그는 하지장(賀知章)의 추천으로 겨우 조정의 벼슬을 얻었으나 얼마 후 쫓겨나 다시 오랜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50대 중반에는 형과 황권을 다투던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막료로 들어가 주군을 칭송하는 시도 여러 편 썼다. 그러나 영왕이 패사(敗死)하는 바람에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 뒤 서남쪽 변방으로 유배됐다가 60세가 가까워서야 풀려났다. 6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여생을 지인에게 의탁해 살아야 했다. ‘시선(詩仙)’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험하고 불우한 일생이었다.

조조의 아들 조식(曹植)도 일찍이 “사람이 한세상 사는 모습은 바람에 날리는 먼지와 같다(人居一世間, 忽若風吹塵)”고 덧없는 인생을 한스러워했다. 그러나 곧이어 치열하게 산 자신의 아버지처럼 “공로를 펼쳐 명군께 힘 보탤 수 있기 바라노라(願得展功勤, 輸力於明君)”는 염원을 드러냈다. 인생을 염교에 맺힌 이슬에 비유한 ‘해로행(薤露行)’이란 시다.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도 “인생은 뿌리와 받침이 없어 길 위의 먼지처럼 나부낀다(人生無根蒂, 飄如陌上塵)”고 비유했지만, 시의 후반에서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왕성한 해는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이 거듭되기 어렵다. 때맞춰 부지런히 힘쓸지니,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노라(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 及時當勉勵, 歲月不待人).”

인생의 덧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삶에 대한 진취적 자세를 보여준 예들이다. 덧붙여 ‘침중기’를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패러디해서 1917년에 발표한 ‘고료무(黃粱夢)’에도 그러한 뜻이 잘 담겨 있다. 작품의 말미에서 노생은 여옹의 말에 수긍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한다. “꿈이기 때문에 더욱 살고 싶습니다. 그 꿈이 깬 것처럼 이 꿈도 깰 때가 오겠지요. 그때가 오는 날까지 저는 정말로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선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이 말에 여옹은 얼굴을 찡그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인생이 짧게도 느껴지지만 살아가는 도중에는 길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좌절과 실패를 겪더라도 끝까지 참고 견디며 분투해야 한다.

곧 봄이 온다. 춥고 긴 겨울을 지내왔기에 봄날은 더욱 반갑고 값지다. 인생에도 겨울처럼 혹독한 시련이 있지만 살다 보면 언젠가는 꽃피고 새 우는 날이 온다. 일 년 내내 봄날이라면 추위를 이기고 난 다음의 봄날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지 실감하기 어렵다. 따라서 일장춘몽 같은 인생이라 생각될 때도 있겠으나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면 삶의 보람과 재미를 느낄 때가 오기 마련이다. 초목이 소생하는 봄날처럼 다시 희망을 갖고 한 해를 잘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