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은 파주와 용산 후암동, 서래마을을 배경으로 세 청년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보여준다. 사진 파인하우스필름
‘버닝’은 파주와 용산 후암동, 서래마을을 배경으로 세 청년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보여준다. 사진 파인하우스필름

도시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새로워지려고 한다. 팽창과 탈피는 숨길 수 없는 도시의 본성이다. 껍질을 벗을 때마다 덩치가 커지는 뱀처럼 도시는 재건축과 재개발이라는 탈피를 거치면서 한없이 커져간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도시가 커지고 새로워질수록 도시에 자리잡지 못하는 사람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도시의 면적이 넓어지는데도 도시 안에 제대로 된 보금자리를 꾸리는 사람은 줄어만 간다. 도시 안에 온전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은 팽창하는 도시에 떠밀려 외곽으로 외곽으로 밀려난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도시 안에 자신의 몸뚱아리를 집어넣어보려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가 될까 말까다. 도시의 경계에는 도시에 들어가려다 실패한 사람들의 주검이 뱀의 허물처럼 쌓여만 간다.

‘버닝’으로 8년 만에 돌아온 이창동 감독은 이런 도시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창동 감독의 첫 번째 영화인 ‘초록물고기’는 일산신도시가 막 지어지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군대에서 제대한 막동이는 아파트촌으로 바뀐 고향의 풍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그는 가족과 함께 작은 식당을 열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한다. 영등포의 나이트클럽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사랑하는 여자도 생겼지만, 서울이라는 도시는 막동이의 꿈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삼킨다. 막동이는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가 진행 중인 건물에서 칼에 찔린다. 곧 허물어질 건물처럼 막동이의 몸도 스러진다. 건물이 헐린 자리에는 더 크고 더 화려한 건물이 들어설 것이다. 

도시화에서 소외된 사람에 대한 이창동의 관심은 ‘초록물고기’ 이전으로 거슬러 간다. 영화감독 이전에 소설가였던 이창동은 1992년에 ‘녹천에는 똥이 많다’라는 단편으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을 받았다. 이 소설은 산업화와 재개발 열풍 속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근본적인 질문을 잃어버린 소시민의 모습을 다뤘다.

주인공 준식은 서울 외곽인 녹천역 근처에 76m2(23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는 동안 준식은 삶의 의미와 가족의 사랑을 모두 잃는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누군가가 길가에 싸질러 놓은 똥을 몸에 묻힌 채 울부짖는다. 

끝내 도시에 보금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스러진 막동이나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지만 텅 빈 껍데기만 남은 준식이나 다를 게 없다. 그들은 모두 도시가 만든 희생자다.

‘초록물고기’ 속 막동이는 신도시 개발로 변한 고향 풍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초록물고기’ 속 막동이는 신도시 개발로 변한 고향 풍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초록물고기’와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막동이와 준식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도시에 대한 이야기였다. 끊임없이 팽창하고 새로워지고자 몸부림치는 도시는 언제든 막동이와 준식을 집어삼킬 것처럼 보였고, 두 주인공을 둘러싼 불안과 위태로움의 정조는 이런 도시의 본성을 전제할 때에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도시는 ‘바스커빌 가문의 개(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에 나오는 포악한 검은 사냥개)’처럼 어둠 속에서 두리번거리며 다음 희생자를 찾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버닝’에서는 도시가 갑자기 활동을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종수가 사는 파주의 변두리 시골 마을에서는 막동이를 밀어내던 서울의 팽창을 감지할 수 없다. 북한의 대남 방송이 들릴 정도로 외진 곳이어서 도시의 욕망마저도 비껴서 있는 걸까. 하지만 우리는 파주의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박찬옥 감독의 ‘파주’에서 이 지역도 도시 개발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확인한 바 있다. 


생명력 잃은 도시…인물들도 막연해져

벤이 사는 서래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 서래마을은 잘 정비된 도로, 건물의 반지하까지 꽉꽉 들어찬 고급스러운 찻집과 술집으로 그려진다. 모든 게 완벽해서 더 이상 새로워질 여지가 전혀 없는 것만 같다. 벤의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서래마을의 풍경은 나른해보일 지경이다. 도시는 재개발 열풍이 한창인 후암동을 비출 때도 잠들어 있다. 카드 빚에 시달리며 내레이터 모델 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해미는 후암동 언덕배기에 있는 4층짜리 빌라 꼭대기층 단칸방에 살고 있다. 작은 창으로 남산타워가 올려다보이는 해미의 방은 20대 청년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만, 너무나 고요해서 서울의 한복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버닝’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는 팽창과 탈피를 멈춘 채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준식과 막동이를 위협하던 거대한 사냥개가 ‘버닝’에서는 박제돼버린 채 벽에 걸린 장식처럼 남아 있다. 문제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가 생명력을 잃으면서 등장인물까지도 덩달아 누군가가 조종하는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살고자 하는 막동이와 준식의 욕망은 도시라는 위협이 있기에 생생했다. 도시가 잠들어버린 ‘버닝’에서는 종수와 해미, 벤 누구의 욕망도 생생하게 와닿지 않는다. 그저 안개처럼 막연하고 처연할 뿐이다.

이창동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의 청년들은 종수와 벤 사이 어디쯤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종수와 벤이 정말 한국 청년의 지금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버닝’ 속 파주와 후암동, 서래마을 사이 어디쯤에 2018년의 서울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버닝’ 속 인물들의 안개 같은 욕망도 리얼리티를 제대로 담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연 2018년의 서울은 어떤가. 지난달 서울 성북구 장위 7구역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철거민이 퇴거됐다. 강제집행이 시작된 지 10개월 만의 일이다. 6월 4일에는 서울 서촌의 ‘본가궁중족발’에 대한 강제집행이 이뤄졌다. 작년 10월 이후 열두 번째 강제집행이었다. 2018년의 서울은 여전히 살아서 꿈틀대고 있다. 팽창과 탈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고, 도시가 만들어내는 희생자의 명단은 한없이 이어진다.

끝없이 팽창하는 도시는 온전한 보금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지옥일 수밖에 없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한 가지 방법은 모르는 척, 못 보는 척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옥의 일부가 되고 우리가 지옥 속에 있다는 사실도 잊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평화롭고 고요한 곳이라고 여기면 지난 밤에 누군가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거리에서 죽어갔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없어진다.

두 번째 방법은 내가 지금 지옥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자각하는 것이다. 지옥인 것과 지옥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서 지옥이 아닌 것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이창동 감독이 ‘초록물고기’와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서 보여준 것이고, ‘버닝’에서는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이 영화엔 이 술

솔로이스트(Soloist)
호주 콜리올 빈야즈의 솔로이스트는 언덕 꼭대기에서 자란 쉬라즈(Shiraz)로 만든 와인이다. 단일 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싱글 빈야드급 와인이어서 이름도 솔로이스트다. 인간은 혼자일 때 외롭지만 와인은 싱글 빈야드일 때 더 값지다. 개성이 더 잘 살아나기 때문이다. 솔로이스트는 농밀한 과일향을 잘 익은 타닌이 부드러운 질감으로 감싸고 있다. 살짝 섞인 바이올렛 향은 세련미를 더한다. 외로운 도시인에게 우아한 위로가 되는 와인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