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즈오카현 하마마쓰 야마하 본사에 전시돼 있는 그랜드 피아노. 사진 블룸버그
일본 시즈오카현 하마마쓰 야마하 본사에 전시돼 있는 그랜드 피아노. 사진 블룸버그

지난 11월 말 일본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에서 아시아 최고의 피아노 경연 하마마쓰 국제 콩쿠르가 열렸다. 3차에 걸친 예선을 통과한 6명의 최종 결승 진출자들은 스타인웨이 & 선스, 야마하, 가와이가 만든 그랜드피아노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여섯 명의 파이널리스트는 각각 세 명씩 일본 브랜드 야마하와 가와이를 골랐고, 저명 건반주자들이 즐겨 연주하는 스타인웨이를 고른 경우는 없었다. 러시아 차이콥스키, 폴란드 쇼팽,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승에서 대부분 스타인웨이를 고른 참가자들이 우승을 거둔 모습과 판이한 풍경이다. 야마하와 가와이가 모두 하마마쓰에 근거를 둔 영향이다.


야마하, 피아니스트에 스튜디오 연습 제공

1887년 시즈오카의 한 소학교에서 의료기 수리공 야마하 도라쿠스(山葉寅楠·1851~1916년)가 일본 최초의 리드 오르간(풍금)을 제조하면서 야마하의 기틀이 마련됐다. 1889년 설립된 야마하 풍금제작소가 현재 악기와 반도체, 음향과 스포츠용품, 자동차 부품에서 굴지의 위치에 오른 야하마그룹의 시작이다. 야마하의 사업 분야 중 악기 부문은 세계 시장에서 독보적인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고, 특히 피아노 생산 면에서 현재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린다.

피아노뿐 아니라 각종 타악기, 전자악기, 현악기, 관악기, 교육용 보급 악기를 만든다. 또 악기 보급을 위한 음악 교실, 악보 출판과 신곡 위촉, 피아노 아티스트 발굴과 관리가 야마하의 이름으로 계열화됐다. ‘야마하 피아노 아티스트’로 등재되면 뉴욕, 도쿄, 모스크바, 베이징, 서울에서 연주나 콩쿠르가 있을 때 ‘야마하 아티스트 서비스’에서 연습할 수 있다. 투어를 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나 콩쿠르 참가자에게 스튜디오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야마하는 핵심을 꿰뚫은 투자로 아티스트의 마음을 샀다. 경쟁 업체들이 야마하의 연주자 관리를 모방한다.

가와이는 야마하 풍금제작소에서 일하던 가와이 고이치(河合小市)가 1927년 독립해 만든 회사다. 1955년 고이치의 사위 가와이 시게루(1922~2006년)의 등장 이래 피아노 판매에서 꾸준히 성장해서 현재 세계 2위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시게루는 고가의 피아노를 할부로 판매한 첫 사업가로 음악 교육 사업, 악보 출판, 골프 사업에 뛰어든 것도 선두 업체 야마하를 벤치마킹한 흔적이다.

가와이는 20세기 중후반, 연주 전문가들을 주 타깃으로 하는 그랜드 피아노 시장보다 가정이나 학교의 풍금을 대체할 ‘업라이트 피아노(울림판과 현이 수직으로 배열된 피아노로 크기가 작다)’ 제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피아노 제조에 들어가는 목재에 따라 품질 차이가 큰 피아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와이는 주요 부품에 아크릴 소재를 도입했다. 가와이는 피아노의 특정 건반이 연주에서 실제 마모되는 정도가 상당해 부품의 교체가 빈번히 요구되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트릴 같은 연주자의 고정된 습관을 지켜주려면 피아니스트의 의도에 정확하게 답할 소재가 쓰여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조성진은 한때 파리 집에선 가와이, 한국 본가에서는 야마하로 수련했다.


하마마쓰 콩쿠르 시작 전에 참가자들은 무대에서 가와이, 야마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연습해보고 고를 수 있다.
하마마쓰 콩쿠르 시작 전에 참가자들은 무대에서 가와이, 야마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연습해보고 고를 수 있다.

경쟁사 장점 수용해 거장의 신뢰 얻어

2018년에도 정식 클래식 공연장에 놓이는 전문가용 피아노 브랜드에서 스타인웨이는 독점적 위치에 있다. 그러나 산업 차원에서 스타인웨이는 지난 50년간 늘 위기였다. 그랜드 피아노 1대당 1억~3억원을 호가하지만 1926년 6000여대가 팔린 데 비해 2012년에는 2000대가 팔렸다. 조율 이외에 유지 보수 비용이 크게 들지 않고 한 번 사면 평균 15년은 쓰다 보니, 신품을 팔지 않으면 제조사는 남는 게 없다. 2008년 스타인웨이가(家)의 승계자 헨리 스타인웨이가 세상을 떠나고 사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2012년 뉴욕 스타인웨이홀이 매각됐고, 이듬해 악기 산업과 무관한 사모펀드 콜버그앤드코에 매각됐다.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1811~1886년)가 개량한 방식과 원형을 지키는 데 충실하다면, 야마하와 가와이의 저력은 시대 변화상에 맞게 능동적으로 피아노를 바라본 점이다. 야마하는 저출산, 핵가족에서 1인 가족으로 전환, 주택 소음 문제를 먼저 조망해서 업라이트와 엘렉톤, 소음 방지 기능을 내장한 어쿠스틱 스타일의 전자피아노를 개발했다. 가와이는 업라이트 무게를 줄이기 위해 탄소 강화 플라스틱을 도입했고, 외장을 아크릴로 마감한 크리스털 피아노도 만든다.

경쟁사의 장점을 수용해 한 단계 높은 차원을 지향하는 점도 일본 브랜드의 강점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 베히슈타인 기술을 도입한 제조 방식이 스타인웨이에 음질과 음량 면에서 밀리자 야하마는 목표를 ‘색다른 스타인웨이’로 수정했다. 이탈리아 테크니션을 통해 풀 콘서트홀에 쓰일 하이엔드 시리즈 ‘CF’ 라인을 출시하면서 건반 표면의 마찰과 미끄러운 정도, 건반과 건반 사이에 손가락이 부딪히는 각도, 페달의 강도 같은 세부사항을 재점검했다. 미켈란젤리, 리히테르 같은 전설적인 건반주자 공연에 자사의 전속 조율사를 보내 거장의 신뢰를 얻었다. 만년의 글렌 굴드도 CF 시리즈를 애용했고 2010년 쇼팽 콩쿠르에서 자사의 CFX를 쓴 아브제예바가 우승을 거두면서 야마하의 오랜 투자는 결실을 보았다.

야마하와 가와이의 선전을 지켜보면 자연스레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국내에서 이어진 영창과 삼익의 라이벌 시대가 떠오른다. 수 십년 동안 한국 피아노 산업을 이끈 양사는 피아노 보급률이 더 이상 늘지 않는 한국을 떠나, 연간 30만대 이상의 피아노를 소비하는 중국에 집중하고 있다. 삼익은 2010년대 초반, 위기에 빠진 스타인웨이 인수를 목표로 총력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영창은 이제 중고 시장에서 선전 중이다. 만일, 2004년 삼익의 영창 인수가 공정위원회 승인을 얻었다면, 지금쯤 야마하는 세계 어쿠스틱 피아노 시장을 놓고 한국의 경쟁자와 용호상박의 각축을 벌였을 것이다.


▒ 한정호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