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내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평가의 대상이 됐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고 그중에서도 발은 가장 숨기고 싶은 구석이 됐다. 아버지는 유독 내 발을 구박하셨는데, 무작정 내 맨발을 보면, “정말 못났다. 보이고 다니지 마라”고 핀잔을 주셨다. 구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내놓고 다녔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을까. 나이가 들어 남자를 만나면서도 맨발 드러내는 걸 은근히 꺼리는 편이었다. 데이트를 막 시작했던 한 남자가 발에 대한 페티시가 있다는 고백을 전화로 했을 때 나는 그를 미리 포기해버리기도 했다. 그는 달콤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여성의 발을 예찬했지만, 내 머릿속에선 오직, ‘맙소사, 이제 그를 사귈 수 없게 됐어’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고작 이십대 중반이었고 그는 내가 처음 만난 미국인이기도 했다. 호감보다 두려움이 더 성큼성큼 앞장설 때였다.


만나면 헤어지기 싫은 남자의 꿈 이야기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한 남자를 만나게 됐다. 열렬한 끌림은 아니더라도 만나면 헤어지기 싫은 상대가 있다. 그와 있으면 시간이 딱 적당한 속도로 흘러갔다. 여유와 설렘이 공존하는 상대가 흔치 않다는 걸 알 만한 나이가 되자 숨 가쁜 속도와 뜨거운 열정만이 연애의 시작을 결정하지 않게 됐다. 몇 차례 만남이 이어졌고 어느 날 밤, 날이 저물고 길이 한적해질 무렵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꿈 이야기를 했던가. 그가 말했다.

“당신이 꿈에 나왔어요.”
“어떤 꿈이었는데요?”
“버스 뒷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잠이 들었어요. 그리고 어느새 당신이 내 어깨에 기대어 나지막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어요.”
“마음에 들어요.”
나는 그 꿈이 마음에 들었다. 헤어지기 직전 집 앞에 서서 그에게 제안했다.
“나, 재워줄 수 있어요?”
“그럴게요.”

그게 다였다.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가 말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그의 말에 따라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불을 껐고 얇은 슬립 차림으로 침대에 누웠고 잠시 후 그가 내 곁에 왔다. 그가 팔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정적 속에 그의 가빠진 숨소리가 가득 찼다. 잠들 수 있을까 더듬더듬 생각하는데, 그가 물었다. “눈을 떴을 때, 내가 여기에 있기를 원해요?”

잠깐의 침묵 뒤 그가 말했다. “원한다면 잠든 거 본 다음, 당신이 일어나기 전에 떠날게요.”

“그렇게 해 주세요.”

마음이 놓였다. 그가 더욱 좋아졌다. 아침의 내 침대 속에서 낯선 누군가를 느끼고 싶지 않았다. 편하고 넉넉한 아침은 대체로 혼자일 때 찾아오니까. 일상의 틈을 벌려 받아 안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한 침대에서 아침을 맞는 일은 피하고 싶다.


관능적이었던 그와의 하룻밤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그의 숨소리가 너무 거칠었다. 그럼에도 불편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잠이 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침대 대부분을 내가 차지하고 있었다. 손을 더듬어 확인해 보니, 그는 몸의 절반만 겨우 침대에 걸쳐놓은 상태였다.

“이리 오세요. 떨어지겠다.”
“괜찮은데.”

그가 몸을 조금 움직였다. 잠깐 두 몸이 자리에 고정된 채 누워 있었다. 어느덧 그의 입술이 더듬더듬 내 입술에 닿았다. 입맞춤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어색하지 않았다. 입술의 느낌만으로, 혀의 감촉만으로 알 수 있다. 나는 그의 혀가 좋았다. 그를 아직 온전히 좋아하지 않아도 그의 혀를 좋아할 수 있었다. 다만 열렬히 반응하기에는 내 상태를 알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내 반응에 그가 입술을 뗐고 잠시 후 그의 혀가 내 귀를,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야 내 다문 입술이 온전히 열리고 탄성이 새어 나왔다. 목을 거쳐 쇄골을, 어깨를, 가슴을 타고 내려갔다. 열정적이되 세심한 연인처럼 그의 혀는 내 몸을 다룰 줄 알았다. 발목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이어갈 때까지 우리 사이에는 탄성 말고 오가는 말은 없었다.

아, 그렇지 않았다. 그가 속삭이듯 물었으니까. “가슴을 만져도 되나요.” 그리고 허리를, 엉덩이를, 그렇게 하나씩 호명하듯. 그랬던가. 꿈처럼 몽롱하면서도 선명한 목소리는 그의 혀를 닮았다. 그가 내 발목을 가볍게 쥐고 들었을 때 잊고 있던 무언가가 되살아났다. 그의 입술이 내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닿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만”이라고 말하자 그가 모든 동작을 멈췄다. 온순한 동물처럼 그는 내 옆에 다시 누웠다.

“꿈 이야기를 다 하지 않았어요.”

잠깐의 침묵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아, 네.”

그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말해 봐요.”

고개를 살짝 비틀어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당신을 안았어요. 짐승처럼. 하지만 이렇게 멈췄어요.”
“좋아요.”

잠시 후 나는 잠이 들었다. 아침 햇살이 스며들 무렵 스르르 눈을 떴다. 그의 팔은 여전히 내 머리 밑에 있었다. 신경이 온통 집중된 듯 미동도 하지 않는 팔이었다. 내린 형벌을 거두듯 몸을 침대 왼편으로 움직였다. 그가 조심조심 팔을 움직였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고양이처럼 고요하게 침대를 떠났다. 그가 의자 위에 걸어둔 옷을 입는다. 그가 문을 연다. 그가 나간다. 거기까지 헤아린 뒤 다시 잠이 들었다. 몸에는 아직 그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혀의 감촉도 베일처럼 몸을 여전히 감쌌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의 혀에만 내 발을 보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꿈을 꾸었다. 우리는 다시 버스 뒷자리에 앉았다. 창이 큰 버스가 덜컹대며 달려간다. 버스 안의 묵묵한 뒤통수들 너머로 우리의 몸이 포개진다. 나는 발을 번쩍 든다. 버스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