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날아가는 황새. 사진 이우석
우아하게 날아가는 황새. 사진 이우석

대한민국에 역병(疫病)이 창궐하고 있으니 평안하고 풍요로운 곳이 그립다. 좁은 한반도에서 좁혀오는 병마의 위협. 이를 피해 쉬어 갈 수 있는 힐링 여행지가 있으면 딱이다. 근처에서 찾는다면 충남 예산(禮山)이 제격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하니 오죽하면 예(禮) 자가 고을 이름에 붙을까. 넉넉하며 의로운 고장이다. 천혜의 자연은 물론, 좋은 농산물, 뜨거운 온천수까지 넉넉한 곳이다. 역사와 전통에 후한 인심까지 있어 모든 면에서 지극히 풍요롭다. 밤새 서로를 위해 낟가리(볏단이나 보릿단을 쌓아 올린 더미)를 지어 나르던 옛 얘기 ‘의좋은 형제’도 이곳 사람이 주인공이다.

봄 마중 길 풍요의 땅 예산을 다녀왔다. 예산에는 수덕사가 있다. 불자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유명한 절이다. 노래 ‘수덕사의 여승(송춘희 노래·김문응 작사·한동훈 작곡)’ 덕에 이곳은 널리 알려졌다. 수덕사는 덕산면 덕숭산이 품은 고찰이다. 백제 시절 창건해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중수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수많은 말사와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특히 경허와 만공 두 스님이 수덕사에서 수행한 이후 선종의 중심 도량이 됐다. 수덕사엔 보물이 많다. 대웅전(국보 제49호)은 중수 시기가 정확하게 밝혀진 최고 목조건물이며, 건축학적 가치가 높다.

고암 이응노의 흔적이 남은 수덕여관을 지나 일직선으로 뻗은 일주문과 금강문을 느릿느릿 걷는다. 슬슬 순을 틔울 준비 중인 나뭇가지 사이로 향내 머금은 바람이 든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대웅전까지 한 바퀴 돌아보고 나니 제법 따뜻하다. 덕숭산에 봄이 오려나 보다.

예나 지금이나 다리(橋)는 중요하다. 끊어진 지점이 서로 연결된다. 물이나 깊은 계곡을 건너 질러갈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엔 스님들이 ‘보시’ 차원에서 많이 놓았다. 예당저수지에 지난해 새로운 다리가 놓였다. 응봉면 후사리 예당호 출렁다리. 동양 최대 보행 현수교다. 가만 보면 이 다리는 어딘가를 잇기 위해 놓은 것이 아니다. 저수지 중앙이 아니라 수변가에 살짝 걸쳤다. 다리를 놓았다고 뭔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왜 놓았을까. 예당호를 즐기기 위해 놓았다. 데크를 따라 물가를 걷고 다리를 건너며 아름다운 호수 풍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산촌 집처럼 둥둥 떠 있는 좌대, 출렁이는 물결 아래로 부지런히 입질하던 붕어 떼,비죽비죽 솟은 나뭇가지. 잔잔한 금빛을 간직한 예당호에 생겨난 흰색 출렁다리는 활력을 불어넣었다. 엄밀히 말해 교통적으로는 쓸모없는 출렁다리, 대신 사람과 자연을 이었다.


사람과 자연을 잇는 예당호 출렁다리. 사진 이우석
사람과 자연을 잇는 예당호 출렁다리. 사진 이우석

우아하고 늠름한 황새의 자태

“황새 울었다.” 예전에 충청도에서 쓰던 말이다. 일이 틀어졌다. 글렀다. 어림없다 등의 뜻이다. 사실은 “황새 울었슈(충청도 방언)”다. 비가 내린 지 한참인데 누가 뒤늦게 나타나 “물꼬 트러 가자” 하면 돌아오는 말이다. 이미 (상황이) 끝나버렸다는 뜻이다.

황새는 울지 못한다. 태어날 땐 성대가 있지만, 곧 퇴화해버린다. 대신 부리를 부딪쳐 소릴 낸다. 소통을 부리 울림으로 한다. 그런 황새가 울었다니 ‘턱도 없는 얘기’란 뜻이다. 충청도 중에서도 황새가 텃새로 살던 지역에서 주로 쓰던 표현이다. 예산이 대표적이다.

황새는 이젠 전 세계에서 고작 몇천 마리밖에 찾아볼 수 없다. 황새는 우리네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새다. 뱁새가 황새를 쫓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에도 나온다. 서양에선 아기를 물어다 준다는 새다. 어쩌면 우리 인구가 감소하는 이유 중 하나가 황새가 줄어든 탓일까.

6·25전쟁을 겪으며 아예 사라졌던 황새(천연기념물 199호). 1971년 4월 1일 자 동아일보는 ‘충북(음성)에 황새 1쌍이 알 4개를 낳고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에 겨우 2마리가 살고 있을 뿐이며, 음성이 국내 유일한 번식지’라 덧붙였다.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신문을 보고 밀렵꾼이 덤벼들었다. 밀렵꾼 이용선은 수컷 황새를 찾아내 쏘아 죽였다. 유일한 황새 번식지에 찾아든 약탈자 이씨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이 와중에 심지어 황새알을 훔쳐 먹은 사람도 있었다).

수컷 황새가 품던 알은 결국 부화에 실패했고 이후 무정란만 낳던 암컷 황새는 1983년 창경원으로 옮겨져 살다 1994년에 홀로 죽었다. 한국 황새는 멸종했다. 모리셔스의 도도새처럼.

이후 황새 복원 노력이 정부 차원에서 이뤄졌다. 일본과 러시아 등에서 황새알을 들여와 부화시켰다. 그러다 2015년 성체 8마리를 자연 방사했다. 현재 예산군 황새 공원에서 인공 부화, 방사한 황새를 키우고 있다. 개체 보존 목적으로 연구 목적의 공원을 지었다. 관심과 애정을 끌어내 황새를 보존한다는 계획이다.

이곳에선 황새와 두루미, 왜가리의 차이 등 황새의 생태적 특성을 배울 수 있다. 야외에선 방사한 황새를 만날 수도 있다. 철조망 너머로 황새가 날아드는 모습을 보면 과연 우아하고 늠름하다. 왕성한 육식 조류인 황새는 두루미(학)나 백로와는 그 ‘포스’가 확연히 다르다. 껑충껑충 걸으며 먹이를 잡는다. 뱀이며 개구리 모두 황새에게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마스크에 눌린 퀭한 눈을 좋은 풍경으로 메웠다. 주린 배는 좋은 음식으로 채우고 식은 몸은 온천물에 데운다. 아직 많이 즐기지 못한 새봄이라 더욱더 즐거운 기행이다. 병마가 물러가면 다시 한번 찾고 싶은 풍요의 고장이다. 겨울에 빠져나간 공허를 채우러 가야겠다. ‘황새가 울기 전’에 말이다.


▒ 이우석
놀고먹기 연구소 대표,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여행수첩

둘러볼 만한 곳 대흥면은 ‘슬로시티(느린도시)’로 지정된 마을이다. 의좋은 형제 공원, 대흥동헌, 달팽이미술관, 대흥슬로시티 안내센터 등이 있다. 짚과 헝겊 갤러리는 꼭 둘러볼 만하다. 주민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과 작은 소품 등이 있다. 말만 잘하면 꽃차도 한잔 얻어 마실 수 있다. 봄부터 주말 장터가 열린다.

먹거리 ‘예산십미(十味)’가 있다. 일단 어죽이다. 예당저수지에서 잡은 잔챙이 민물고기를 갈아 김칫국물을 넣고 팔팔 끓인다. 거기다 수제비와 국수를 뚝뚝 떼어 넣은 어죽이 봄 입맛을 살린다. 예산읍 예산시장에선 푸짐한 소머리국밥을 맛볼 수 있는 골목이 있다. 돼지가 아닌 소를 국밥으로 낸다. 건더기 한가득 소머리국밥은 7000원. 같은 국물의 소머리국수는 달랑 5000원이다. 진한 국물이 혓바닥에 쩍쩍 붙는다.
와인도 있다. 포도가 아닌 애플와인이다. 유학 했던 사위가 장인의 과수원에 들어와 지역 특산물인 사과를 이용해 와인을 담근다. ‘추사애플와인’. 향긋한 사과 향이 진하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