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를 모사한 루벤스의 그림. <사진 : 위키피디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를 모사한 루벤스의 그림. <사진 : 위키피디아>

앙기아리 전투
심상대 지음 | 예옥
1만3000원 | 248쪽

1494년 피렌체 시민들은 공화국을 수립한 뒤 그 역사적 승리를 영원한 예술로 남기고 싶어했다. 시민회의는 당대 예술의 양대 산맥이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벽화를 의뢰하기로 했다. 베키오궁 내부의 벽을 두 천재의 손으로 꾸미게 했다. 피렌체 공화국의 실세 마키아벨리가 직접 작품을 의뢰했다.

다빈치는 1440년 피렌체 군대가 밀라노 군대를 앙기아리에서 꺾은 전투를 기념하는 벽화 ‘앙기아리 전투’를 맡았다. 다빈치는 1505년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마병들이 격렬한 몸짓으로 싸우는 장면이 생생하게 재현될 예정이었다. 다빈치는 벽화를 거의 완성할 즈음 의도대로 색채가 나지 않자 손을 놓았고 베키오궁을 떠났다. 그로부터 50년 뒤 궁전 내부 공사를 통해 다빈치의 벽화는 종적이 묘연해졌다. 벽화 내용은 누군가가 모사한 그림을 다시 흉내낸 루벤스의 그림으로만 전해온다. 루벤스의 모사화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다빈치의 벽화 ‘앙기아리 전투’는 그 이후 사라진 채 미술사의 전설이 됐다. 그러나 2012년 이 벽화가 베키오궁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현재 그 궁에 있는 바사리의 벽화 ‘마르시아노 전투’ 뒤에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바사리의 벽화 뒤에서 발견된 다빈치 벽화

이 벽화를 추적해 온 미국 샌디에이고대학의 마우리치오 세라치니 교수가 바사리의 벽화에 쓰인 글씨 ‘CERCA TROVA(찾으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를 유심히 들여다보곤 레이저와 자외선 카메라를 동원해 벽화의 뒷부분을 관찰한 뒤 작은 구멍을 뚫고 벽화 뒷부분의 물감 성분을 분석했다. 그리고 다빈치가 썼다는 물감 재료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여론은 크게 양분됐다. 다빈치의 벽화를 되찾자는 주장 못지않게 바사리의 벽화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현 상태로는 바사리의 벽화는 살아남고, 그 덧칠한 그림 뒤의 다빈치의 벽화는 미완의 전설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소설가 심상대가 바로 그 벽화의 사연을 모티브로 삼아 장편 소설 ‘앙기아리 전투’를 냈다. 문예창작과를 나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한 작가가 문학과 미술을 넘나들며 예술의 의미를 탐구한 소설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지배해 온 한국소설사에서 보기 드물게 탐미주의와 유미주의의 맥을 잇는 작품이다.

다빈치의 벽화를 둘러싼 소동은 예술의 존재 양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심상대는 소설 속의 한 인물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암시했다. “어쩌면 바사리의 벽화보다는 망가지고 미완성인 벽 뒤편의 벽화가 더 많은 이야기와 더 아름다운 꿈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몰라요”라는 것이다.

그런데 심상대는 다빈치 벽화를 위한 소설을 쓰지 않았다. 대중소설 ‘다빈치 코드’ 같은 팩션을 쓴 게 아니다. 그는 그 실화를 입심 좋게 묘사해서 소설 중반에 불쑥 전달하기만 했다. 다빈치 벽화는 소설 속의 여러 일화 중 하나에 그친 것. 독자의 시선을 깊이 빨아들이는 액자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큰 그림은 단순하다. 정년 퇴임한 영문과 교수와 그의 제자인 소설가가 술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소설의 주제도 명쾌하다. 다빈치 벽화처럼 삶의 진실은 일상의 표면 뒤에 숨어 있다가 뒤늦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람은 말년에 이르러 대부분 삶의 실체를 마주하면서 지금껏 숨어 있던 진실의 현현을 저마다 깨닫는데, 진정한 삶이란 평소 그 숨은 진실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눈앞의 벽화 뒤에 숨은 벽화를 상상력으로 묘사하듯이, 예술을 향한 열정이 그나마 비루한 삶의 진정성을 보완해준다’고 작가 심상대는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