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령 터널을 벗어나자 수석(壽石) 같은 울산바위가 늠름한 위용을 드러냈다. 사진 이우석
미시령 터널을 벗어나자 수석(壽石) 같은 울산바위가 늠름한 위용을 드러냈다. 사진 이우석

강원도 속초가 붉은 때때옷을 벗어 던졌다. 푸르고 너른 파도로 팔 벌려 나를 불렀다. 당장 짐을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설악(雪岳)은 이제야 제 이름을 찾는다. 영랑과 청초도, 동해도 비로소 속초답다.

미시령을 관통하면 이른 눈을 이고 있는 설악의 늠름한 기세를 당장 느낄 수 있다. 이파리를 모두 떨어내고 우람한 근육을 그대로 드러낸다.

설산과 호수, 바다 그리고 바닷가 사람들…. 특유의 문화와 먹을거리까지 단 한 번의 루트로 즐기고 올 수 있는 곳이 지금의 속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처럼 길고도 깜깜한 미시령 터널을 지나면 눈부신 빛을 발하는 설악이 나오고 밑바닥까지 푸른 바다가 보인다.


풍요로운 자연과 다채로운 문화

거대한 수석(壽石) 같은 울산바위가 늠름하게 섰다. 흰 비단을 두른 듯 고귀한 자태가 먼길을 달려온 여행객을 환영한다. 울산바위도 마산봉도, 수바위까지도 눈을 이고 삼두근을 자랑한다. 길은 저 멀리 보이는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친다. 해발 500~600m에서 순식간에 바다로 향했다.

속초는 그 범상찮은 자연지세도 일품이지만 문화적으로도 다채롭다. 청호동 아바이마을. 느릿한 추억을 부여잡고 거친 바다와 싸워가며 살아온 실향민 마을이다. 피란을 온 함경도와 강원도의 이북 사람들이 눌러앉았다. 이승기와 강호동이 오고 관광객이 이를 따르면서 갯배 선착장 주변 분위기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대신 뒤편에 얽힌 좁은 골목길에는 아직 옛 풍경이 오롯이 남았다.

주워오고 얻어온 잡어를 다듬어 식해를 담는 할머니, 자식보다 오래된 철제 자전거를 끌어다 놓고 기름칠하는 할아버지는 선명한 청호동의 실제 모습이며 주인공이다. 시(市)가 돼 버린 속초에서 유일하게 남은 옛 풍경이다. 오갈 데 없어 모래톱에 눌러앉은 실향민이 오히려 속초의 근현대 전통 문화상으로 자리 잡았다.

해변을 걸었다. 그래봤자 고작 11월 주제에 저도 겨울이라고 몰아치는 바람. 차갑지만 출근길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아바이순대 한 접시와 가리탕(갈비탕) 한 그릇에 몸을 녹일 수 있다.

속초의 자연은 풍요롭다. 기암괴석 두른 해변만으로도 멋질진대, 박력 넘치는 금강, 설악, 백두대간으로 병풍을 세웠다. 서정적인 호수도 있다. 청초와 영랑, 속초의 두 눈동자라 불리는 이들 호수는 죄다 석호(潟湖)로 수만 년의 세월 속에 자연적으로 생성됐다(국내 호수의 대부분은 인공호다). 영랑은 산책하기에 좋고, 청초는 바다와 산을 바라보기에 좋다. 청초호 인근 엑스포 공원 쪽 바닷가에 서서 설산을 감상하면 멋있다. 아침에는 푸른 바다 위로 새하얀 산들이 삐죽삐죽 늘어선 모습이 인상적이다. 해가 뜬 직후라면 붉은빛을 받아 분홍색을 내기도 한다.

오랜만에 찾은 바다를 좀 더 느끼며 걷고 싶다면 외옹치항으로 가면 된다. 오랜 기간 철책으로 묶였던 초병 순찰길이 근사한 해변 트레일로 변신해 바다 풍경을 눈에 담기 좋다. ‘바다향기로’라 이름 붙은 이 길을 걷다 보면 정말 코끝에 바다 내음이 묻어난다. 뺨에 부딪히는 초겨울 바람은 차갑지 않고 되레 청량한 갓김치의 첫맛 같다.


‘바다향기로’라는 이름이 붙은 외옹치항 해변 트레일. 사진 이우석
‘바다향기로’라는 이름이 붙은 외옹치항 해변 트레일. 사진 이우석

여독 풀어주는 온천도 그만

여기서 그치면 밋밋할 터, 온천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설악은 삶에 지친 많은 이를 품어줄 만큼 넉넉한 온탕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 걷고 보고 즐기다 밤에 김을 모락모락 피우는 온천에 몸을 살짝 데친 후 다시 여정을 이어 가면, 여독(旅毒)이란 괴상한 말 따윈 입에 올릴 거리도 못 된다.

즐길 거리도 풍부하다. 국립산악박물관과 체험형 관람 시설 ‘얼라이브 하트’도 설악산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근사한 미술관과 차분한 분위기의 커피숍, 활력이 넘치는 재래시장도 여전하다.

눈이 잔뜩 온 날도 좋다. 기어코 산을 넘어 설산 트레킹을 하려면 화암사 뒷길 트레킹을 즐기면 된다. ‘크리스마스 장식’ 같은 나무 터널 속에서 은빛 산책을 할 수 있다. 스패츠(각반)와 아이젠은 필수다. 한 세 시간 걸린다.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화목한 가족이, 다정한 연인이, 씩씩한 친구가 모두 즐거운 곳이 바로 지금의 속초다. 그 ‘차가운 물’이 지친 내게도 활력을 줬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5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얼라이브하트 입장료 1만2000원. 다이나믹 메이즈 1만2000원(얼라이브하트 패키지 1만8000원) 만 6세 이상 입장 가능(초등학생 이하 보호자 동반). 문의 www.aliveheart.co.kr

숙소 한화 쏘라노와 대명 델피노를 비롯해 내설악 켄싱턴 스타호텔, 속초 스카이씨크루즈호텔 등 다양한 분위기의 숙소에서 자연과 팔베개하고 잠들 수 있다.

먹거리 속초는 산과 바다에서 나는 맛난 제철 먹거리에다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간식거리, 이북 피란민의 식문화가 어우러진 다채로운 메뉴가 널려 있다. 잘 알려진 닭강정과 대게 이외에도 식사거리와 주전부리가 많다.

동해안 항구도시에서 으레 먹는 장칼국수 대신 멸치 육수에 감잣가루, 김을 넣고 팔팔 끓여낸 깔끔한 국물이 좋은 ‘도문집’은 칼국수와 만두로 유명하다. 40년 넘게 장사하며 지역민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직접 빚은 만두가 대표 메뉴다. (033)630-5150

특별한 국밥을 맛보고 싶다면 ‘속초 문어 국밥’이 좋다. 한우 양지와 참문어를 삶아 시원하고 구수한 국밥을 차려낸다. 일반 소고기 국물보다 시원한 맛이 더 좋다. 다진양념은 굉장히 매우니 조금만 넣는 것이 이롭다.(033)638-8837

도치알탕은 제철 음식으로 딱이다. 꼬들꼬들한 살과 알이 가득한 탕은 김치를 넣고 끓여 시원하다. 알이 한가득인 국물을 떠서 밥을 말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든든하다. 영랑호 인근 포장마차촌 당근마차는 도치알탕 이외에도 자연산 백고둥으로 무쳐낸 골뱅이무침과 도루묵구이가 유명하다. 곁들여 주는 간장새우장는 밥도둑이다.(033)632-3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