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 등단 50년 만에 첫 산문집, ‘시인과 나무, 그리고 불빛’을 낸 오생근 서울대 불문학과 명예교수. 사진 조선일보 DB
비평가 등단 50년 만에 첫 산문집, ‘시인과 나무, 그리고 불빛’을 낸 오생근 서울대 불문학과 명예교수. 사진 조선일보 DB

시인과 나무, 그리고 불빛
오생근│문학판│471쪽│2만원

오생근 서울대 불문학과 명예교수는 초현실주의 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초현실주의 문학의 주역이었던 시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를 접한 뒤, 그 매력에 한없이 빠져들었다고 했다. 그 이전까지 강의실에서 배운 프랑스 문학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나 보들레르에서 시작해 발레리로 끝나는 상징주의 시뿐이었는데, 젊은 프랑스인 교수가 처음으로 읽어준 시 ‘자유’는 기존 프랑스 문학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학 이해의 세계를 향해 나가도록 했다.

오 교수는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우리말로 완역한 것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해 계간 ‘문학과 지성’ 편집동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해 온 오 교수가 비평가 등단 50년 만에 첫 산문집을 냈다.

이 책의 첫머리는 에세이 ‘불빛을 그리워하며 방황하던 젊음’이 장식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가로등뿐만이 아니라, 어딘가로 멀리 떠나는 밤 열차의 불빛’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고, 우연히 지나치게 된 ‘야간 공사장의 각목 태우는 불빛’에도 매력을 느껴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상상력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인간은 필요에 의해서 불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 속에서 불을 발견했다’고 설파한 것을 되새기면서, 자신이 타오르는 불의 즐거움을 통해 삶이 고양되는 느낌을 갖고 불 주변의 사람들과 동료의식을 나누게 된 경험을 떠올렸다.

청춘을 회상하는 글을 통해 오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자아의 중심에서 타오르는 정신의 불꽃에 삶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그의 첫 산문집은 다양한 소재를 다룬 글모음집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자아의 핵심에서 타오르는, 즐거운 불의 힘이 글쓰기의 동력원으로 작용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백미(白眉)는 제2부 ‘프랑스 시 깊이 읽기’에 있다. 오 교수는 프랑스 현대시의 대표작을 새롭게 번역하고 해설을 달면서 그가 오래 간직해온 정신의 불꽃으로 언어의 꽃밭을 꾸몄다. 

그는 평생 공부해 온 엘뤼아르의 시 ‘여기에 살기 위해서’를 다시 옮겼다. “하늘의 버림을 받고, 불을 만들었지/ 친구로 지내기 위한 불을/ 겨울밤을 지내기 위한 불을/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불을”이라고 시작하는 시의 화자는 “빛이 나에게 준 것을 그 불에 주었지”라는 시구를 거쳐 “나는 불꽃이 파닥거리는 소리만으로/ 그 불꽃이 타오르는 열기의 냄새만으로 살았지”라고 노래했다.

오 교수는 “이 시는 ‘불’에서 시작해 ‘불’로 끝나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라며 “이 시를 관통하는 불의 이미지 때문에, 이 시는 언제라도 젊은 독자의 내면에 강한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그는 “이 시에서 내가 제일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중간쯤에 나오는 ‘빛이 나에게 준 것을 그 불에 주었지’라는 구절이다”라고 털어놓았다.

이리하여 그의 시 해설은 자기 수련의 고백이 된다. “어느 순간 ‘준다 donner’라는 동사에 증여와 기부를 뜻하는 ‘don’이라는 명사가 들어 있고, 이 명사에 하느님과 자연이 준 ‘선물’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불’이 나의 친구라면 그 ‘불’에게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