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여성은 남성 예술가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다.

 내가 다른 모든 여성적 의무에 우선해서 예술을 성취할 의무가 있는가.

 또 여성의 성취가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확신이 없다.

 그 결과 자신의 아이디어를 끝까지 밀고 갈 꾸준함이 결여되어 있다.

 나는 항상 열등감에 시달린다, 남자와 비교해서.”

 1965년 한 여성 미술가가 다른 여성 미술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1970년 34살의 나이로 요절한 이 여성 작가는 자신만의 예술을 성취했을까? 그 대답을 우리는 서울  사간동 국제갤러리(11월19일까지)에서 찾을 수 있다.

 ‘에바 헤세(Eva Hesse), 변모(Transformations) - 독일에서의 체류 1964~65’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한 작가의 매우 의미 있는 시기의 작업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다른 전시와는 차별화되는 아주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헤세의 1964, 1965년은 스스로 변모하는 중요한 시기였고 드로잉, 콜라주, 부조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 과정을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다.

 여성이 주는 한계를 항상 자각했던 에바 헤세의 1968년 글을 다시 찾아서 보게 되었다. 과거의 심리적 좌절감을 극복하고 예술에 대한 자신의 철학, 자신의 작업에 대한 신념이 보인다.

 “작업은 작업 그 자체를 넘어가야 된다. 나의 조형 어법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에바 헤세의 “It is something, it is nothing.”이라는 문장에서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만큼 예술의 본질을 잘 나타낸 말이 있을까?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참 번역하기 어렵다. 예술 작품이란 한편으로는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면서 또한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것이다. 또 그렇게 보인다.

 헤세의 작품이 주는 중요성은 그녀의 입체 작업에서 자유롭고 실험적인 재료를 사용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미술대학에서 특이한 소재를 많이 쓰지만 그 당시로서는 선구자적인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고무풍선 위에 종이 으깬 것을 바르고 로프로 칭칭 묶고 그 위에 검은 색칠을 한 후에 그물망에 넣어 매단 입체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작품의 형태와 표면의 느낌이 무의식에서 직접 튀어나온 것 같다.

 한 관람객이 독일 소시지나 햄을 벽에 걸어 놓은 것 같다고 얘기하는 것을 엿들었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전채로 먹는 프로슈토 햄과 멜론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전시장 2층의 드로잉들은 이 햄을 얇게 저며서 펴 놓은 것일까. 아니면 저 드로잉들을 전부 차곡차곡 붙여서 고압으로 압축시킨 것이 이 작품일까. 헤세의 독일 체류 이후의 조각 작품들은 이 시기의 저 수많은 드로잉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니 이런 상상도 일리가 있을 것 같다.

 모든 성취하는 사람들의 출발점을 보면 의외로 열등감에 시달린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또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예술가들의 ‘내적인 드라마’야말로 미술을 보는 관객들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일 것이다.

 헤세는 말했다.

 “의미 있는 성취를 위해서는 엄청난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스스로 사고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나는 항상 이 생각을 한다.” 

 헤세의 말을 이어 나는 예술가에 대해 이런 말을 만들어 보았다.

 “I am somebody, I am nobody.”

(나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