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의 대표작가인 박완서씨는 40대에 등단, 지금까지 숱한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된 60세 박찬순씨의 등단은 ‘21세기 박완서의 등장’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순 나이에 소설가로 등단한 박찬순씨의 출사표는 조심스럽지만 당당하다.
 "나이 때문에 만나자는 거면 사양하고 싶네요.”

 인터뷰 요청에 대한 박찬순씨의 응답이었다. 작가로서의 입신보다 나이 먹은 노인의 늦깎이 등단으로 보는 시선을 부담스러워했다. 소설가로는 이제 막 면허를 딴 ‘초보’지만 박찬순씨는 30년 경력을 지닌 베테랑 프리랜서 외화번역가다. 76년부터 시작해 <맥가이버>와 같은 외화를 비롯해 다큐멘터리 등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해오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번역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번역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을 겸하고 있어 1인 3역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오십 중반에 소설을 써보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계기가 됐어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양반집 며느리가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여의고 막노동과 행상같은 고생을 하시며 저희 4남매를 키우셨어요. 그런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자 ‘나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면 정말 하고 싶었던 일, 스스로 즐겁고 환해질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어요.”

 출판사업을 하던 남편 사업이 어려워지고, 건강까지 잃은 뒤부터 박찬순 씨는 꽤 오랜 세월을 실질적인 가장으로 살았다. 번역한다고 하면 고상한 직업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피 말리는 마감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그나마 지속적으로 일감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여유나 딴 짓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박 씨는 말한다. ‘살면서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이 일 하느라 제대로 두 아이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일 정도로 박 씨의 지난 30년은 치열했다.

 “그 흔하다는 학원 한번 보내지 못했고, 심지어 학부모로 학교에 한 번 가보지도 못했어요. 매년 등록금 걱정하며 살 정도 살림이 빠듯했어요. 그래도 별 탈 없이 잘 커서 대학 졸업하고 건실하게 직장생활하는 걸 보면 고맙고, 미안하죠.”

 연세대를 졸업한 박 씨는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비슷한 시기 선후배로 학교를 다녔던 최인호, 윤후명 같은 이들이 20대 초반에 척척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걸 보면서 박씨는 ‘저런 천재들만 작가가 되는 거구나’하고 생각했었다고 털어놓았다.

 “문장 탄탄하고 감수성 반짝이는 젊지만 선배인 작가들 보면 ‘내가 아직 갈 길이 멀구나’하게 돼요.”

 신춘문예 당선자의 90%가 1년 안에 흔적 없이 사라진다고 하는 속설이 있다. 신인왕전에 올랐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프로복서가 되란 법 없는 이치와 같다. 더구나 이순(耳順)의 나이를 코 앞에 두고 비로소 등단한 박찬순씨는 앞날이 구만리 같은 신진 작가들에 비해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고 뒤척일 때가 많다.

 28년 전 강남구 대치동에 마련한 주공 아파트 하나가 다가올 노후생활의 유일한 대비책. 두 아이 모두 장성했지만 아직 미혼이라 결혼자금도 얼마간 보태야 하고 병원에서 투병 중인 남편의 병원비를 포함해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 인터뷰 중에도 ‘번역 일이 밀려 있어 걱정’이라며 일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당장 내일을 모르는 프리랜서’라며 웃었다. 박찬순씨의 내일, 미래계획을 물었더니 싱거운 대답이 돌아온다.

 “솔직히 대책 없어요.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거죠. 마감에 못 맞출까봐 전전긍긍, 거기에 더 좋은 작품 써야한다고 안달복달 하면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