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자가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일하는 여자, 아이 기르는 여자, 출산을 유보하는 여자, 아이를 학수고대하는 여자, 결혼한 여자,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는 여자,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는 여자, 피곤에 절어 잠자리조차 하기 싫어하는 여자, 겉보기의 여유와는 달리 뒤처지는 느낌에 시달리는 여자, 24시간 내내 쫓겨서 자신에 대해 생각조차 못하는 여자 등등. 징그러운 것은, 이런 다양한 상황의 대다수가 어느 여자에게든 적용된다는 것이다.’

 건축가 김진애의 책 〈인생은 의외로 멋지다〉에서 발췌한 문구를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 땅에 나와 같이 자아 분열적 30대를 보내는 동지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과 끝이 명료하지 않고, 늘 그 중간치에서 얼쩡거리는 듯한 분주함…. 그 와중에 접한 이종구(51)의 전시 소식이 부러웠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물론 이런 부러움은 그의 활발하고 독창적인 예술 세계가 한국 미술의 발전에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했고,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나는 그의 ‘올해의 작가’ 선정과 이에 따른 대규모 회고전 소식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의 전시가 부러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로 승화된 불우한 과거, 불편한 현실

 바쁜 동선을 살아가는 나는 가끔 내 머리 속을 활짝 열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탁한 공기도 환기시키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그랬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1984년부터 최근까지 그의 작업들이 각각 ‘고향땅 오지리’‘고개 숙인 농민의 분노’‘희망의 씨앗을 뿌리며’‘우리 땅 우리 겨레’라 이름 붙여진 네 개의 서랍에 말끔히 정리될 수 있었음에 있다.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 이종구는 서해안 바닷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유난히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위험한 낫과 투박한 나무가 다양한 가위와 현란한 색종이를 대신하는 시절을 살았다. 그렇게 그는 미숙한 낫질로 썰매와 팽이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남들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에 학교에 입학한 이종구는 미술학원에 다닌 적도, 미술대회에 참가해 본 적도 없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그렇게 그는 ‘그림을 그리는’화가가 되었다.

 어린 시절 아들의 손에 들린 낫이 못미더워 꾸지람을 일삼던 아버지. 이종구의 예술은 그 언저리에서 출발한다. 〈연혁-아버지〉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농부의 초상과 농촌의 현실을 주제로 삼았던 그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밭고랑 같은 주름, 논바닥 같은 피부가 아버지의 초상이다.  한평생 땅을 종교처럼 숭배해 온 탓일까. 이미 그 생김은 땅과 닮은 꼴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척박한 논바닥과 그것을 경작할 낫, 호미, 삽이 전부였을 것이지만 당당함이 남루함을 앞선다. 

 <연혁-아버지〉는 이종구가 처음으로 아버지를 소재로 삼은 최초의 ‘쌀부대’ 그림이다. 그의 작업은 극사실적인 묘사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아버지의 출생일 및 출생지를 밝히고 있는 호적등본처럼 ‘정부 양곡, 찐 보리쌀, 3㎏x10개입, 찐보리쌀의 특징’과 같은 글씨들 또한 사실적인 묘사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당시 쌀을 포장했던 종이 부대다.

 처음에 이 작품을 구상할 당시 그는 캔버스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염전일과 농삿일을 한평생 병행했던 아버지와 하얀 캔버스 사이의 심리적 간극을 극복할 수 없었다. 깨끗한 캔버스는 아버지의 겉모습을 재현하기에는 적당했지만 아버지의 생애겱??틒정신 등과 같은 내면적인 요소를 담아 내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농민들의 생활을 단적으로 함축하는 상징이자 당시의 농촌 현실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징표로서 쌀부대를 재료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그가 ‘쌀부대’의 작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이런 종류의 작업들을 통해서다.

 이종구의 극사실적 농민화는 분명 불편하다. 남루한 농부의 행색이 불편하고, 비루한 농촌의 현실이 불편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난 20여 년간 그가 천착해 온 이 불편함이 매주 화요일 오전 나를 불편하게 하는 쓰레기 분리수거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아마 그 또한 계속해서 그 불편함을 정면으로 맞섰기에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을 터. 이쯤에서 나는 다시금 각오를 새롭게 한다. 자아 분열적 30대의 건승을 위하여 내 삶의 가파른 속도로 무조건 버텨 보기로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2전시실, 5월12일~7월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