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귀여워 하는 것은 상처 치유의 좋은 방법이다.
서로를 귀여워 하는 것은 상처 치유의 좋은 방법이다.

남자는 가벼운 사회 불안증을 앓고 있다. 원치 않는 약속이나 모임에 나가야 할 때면 눈빛이 흔들리고 종종 안절부절못할 때가 있다. 여자는 함께 있을 때조차 앞으로 다가오는 다음 약속에 대한 불안으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를 보고 말한다.

“혹시 다음 약속 걱정돼?”

“응. 티나?”

“잘 안 나. 그래도 그걸 나는 알아볼 수 있어서 좋아.”

“아, 자꾸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아니야. 약속 나가는 게 불안하면서도 억지로 다 괜찮은 척하지 마. 네 불안한 모습도 귀여우니까.”

남자는 그가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을 헤아리는 여자가 그리고 상황에 무너지는 그를 무안하지 않게 대해주는 태도가 좋다. 심장을 꽉 누르는 걱정거리들이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라는 것도 예감하게 해 준다. 걱정하는 그의 모습조차 여자는 사랑스럽다고 해 준다. 그녀는 그를 ‘귀여워해 준다’. 남자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 스스로가 싫어질 때마다 그를 귀여워하는 그녀를 떠올린다. 그녀의 귀여움이 그의 불안증을 해결해 주진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불안증을 앓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타박하는 일을 잠시 멈추게 한다. 남자는 그가 귀여워하는 그녀가 귀여워하는 사람이다. 그의 불안은 그녀가 귀엽게 바라보고 그 너머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는 그만의 반짝이는 신호등이다.

우리의 우울이나 슬픔, 혹은 고통은 무찌르고 없애고 당장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성폭행과 아동 학대 생존자이자 사회 활동가인 아미타 쇼딘(Amita Swadhin)은 치유를 우리가 다다라야 할 하나의 목적지가 아니라 반복해서 실습하고 실천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상처는 지워버려야 할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크고 작은 무늬와도 같다. 흐려지기도 하고 진해지기도 하며 우리의 작은 일부가 되기도 한다. 누구도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크건 작건 불균형한 정신과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다. 상처와 과거나 환경으로 존재 전체를 규정하고 납작하게 만드는 일은 우리 자신의 영혼마저 가난하게 만든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와 고통과 크고 작은 징후들이 삶과 운명을 결정하지 않도록 함께 도와 갈 동반자가 필요하다. 서로의 고통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무심하게 지나가지 않더라도, 기꺼이 받아주되 무게에 압사되지 않는 용기와 가뿐함을 지닌 동지들은 색다른 힘이 되기도 한다. 

내가 느끼는 내 존재의 못생김을, 웃음과 사랑스러움의 대상으로 환치시키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누르던 돌무더기 중 하나쯤은 굴러 떨어져나간 기분이 든다.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지 않아도 좋다. 치유란 이뤄야 할 목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실천하고 익숙해지는 행위다. 혼자 익히고 배워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동료나 가족, 친구 혹은 전문가, 사회와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내 결점이 추하고 역겹고 기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해 주는 시선 또한 도움이 된다. 

내가 집착하는 나의 결점을 누군가는 복잡하고 신비롭고 흥미로운 나란 우주의 조금 다른 별처럼 들여다본다. 그리고 나를 통째로 끌어안고 외쳐 주기도 한다. 당신은 귀여워. 나는 당신을 귀여워해.

만일 누군가 나를 존경한다거나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기쁜 만큼 불안하다. 나의 무수한 결점들 중 무언가를 들켜 그의 존경이나 사랑을 잃어버리게 될까 봐. 사랑만큼 황홀한 감정은 없지만 때로는 너무 크고 또 너무 대단해서 자꾸만 내 가치를 숨죽여 점검하게 된다. 

귀여움은 좀 다르다. 사랑보다 더 느슨하고 편안해서 안전하다고 느낀다. 못남이나 부족함이 사랑의 대상이 되는 길은 멀고 멀어 보이지만 귀여움의 대상이 되는 건 작고 귀여운 기적처럼 지금 바로 가능할 것도 같다. 

왜냐면 나 역시 내 주변에서 숱한 귀여움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꽃잎이 귀엽다. 다리 짧은 강아지의 발발거리는 발걸음이 귀엽다. 아이의 빠진 앞니 구멍이 귀엽다. 일흔이 다가와도 자꾸 또 자꾸 사랑에 빠지는 엄마가 귀엽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눈을 꼭 감아버리고 마는 친구의 어색함이 귀엽다.


‘귀여워하기’는 배우고 익혀야 할 행위

다시 앞선 이야기의 여자와 남자에게로 돌아가자. 남자는 여자를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행복의 순간 중 그의 불안 앞에 경쾌하게 웃어 주던 그녀와의 시간을 내게 꼽았다.

“제 문제, 저란 사람을 모조리 한심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게 해요.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져요.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따라 웃게 되고요. 내 미세한 불안함을 먼저 알아봐 주는 것도 좋고 그런 나를 괜찮다는 듯이 바라봐 주는 모습도 좋아요. 게다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귀엽다고까지 해 주니 그녀 앞에서는 나를 숨기거나 더 나은 사람처럼 가장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편안해지기도 하고요. 나란 존재가 무겁고 답답하게만 느껴지지 않고 그 무게가 가뿐해지는 것도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뻤어요. 왜냐면 그녀는 제가 가장 귀엽다고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거든요.”

“어떨 때 귀여워하는데요?”

“저한테 실수하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 비장해질 때요. 바로 사과하기 미안하니까 더 심각해지는 거, 저는 알거든요. 그리고 얼마나 미안해하는지도 느낄 수 있고요. 그녀가 늘어놓는 온갖 깨달음의 말들이 사실은 우렁차게 ‘미안해, 미안해, 용서해 줘’라고 소리치고 있다는 걸 저는 잘 알아요. 그 쑥스러워하는 그녀만의 진실이 저는 귀여워요.”

서로 귀여워하는 관계는 막강하다. 존재를 향한 너그러움과 연민이 함께할 때 우리는 잠시일지언정 안전과 자유를 동시에 느낀다. 

대체로 우리가 누리는 안전은 약간의 지루함을 동반하고 불안 없는 자유란 아주 드물다. 그런데 귀여워함이 선사하는 넉넉함에는 함께 가기 어려운 두 즐거움이 사이좋게 어우러진다. 서로를 귀여워하는 순간은 내내 찾아오거나 끝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귀여워하기 역시 우리가 다다라야 할 목적지이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안식처는 아니기 때문이다. 귀여워하기는 실천이다. 우리가 배우고 실습하고 익혀야 할 행위이자 상태다. 치유처럼 말이다. 이렇게도 말해 볼까. 함께 귀여워하기는 치유의 꽤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