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쿠샤의 과거 모습. 서울시는 이곳을 2020년까지 ‘알버트 테일러 박물관’으로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딜쿠샤의 과거 모습. 서울시는 이곳을 2020년까지 ‘알버트 테일러 박물관’으로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우리나라 행정동 명칭은 그 지역의 특징을 따서 지어진 경우가 많다. 특히 도시 안 오래된 동네의 행정동 명칭은 역사적·장소적 특징을 내포한 경우가 많다. 딜쿠샤가 위치한 ‘행촌동(杏村洞)’ 역시 마찬가지다. ‘행촌동’이라는 지역명은 1914년 ‘은행동’과 ‘신촌동’을 합친 것이다. 이 지역에 은행나무가 있어 붙여진 ‘은행동’ 명칭에서 ‘행’을 따왔다. 과연 어떤 은행나무였기에 행정동 명칭으로 남았을까.

행촌동 서양식 저택 딜쿠샤에 거주했던 알버트·메리 테일러 부부 가운데 아내였던 메리는 자서전에서 이 은행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부부는 어느 날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걷던 중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한다. 키가 30m는 거뜬히 넘는 행촌동 은행나무였다. 이들은 종종 이 나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와 서울을 내려다보고는 했다. 멋진 나무와 주변의 풍광에 만족하던 테일러 부부는 해당 토지를 매입해 1923년 딜쿠샤를 준공했다.

딜쿠샤 건설에 큰 요인이 된 은행나무는 인근 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여겨진 대상이었다. 600년의 파고를 견딘 성스러운 존재였다. 주민들은 인근에 살았던 권율 장군이 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믿었고, 은행이 다산을 상징하기 때문에 여인들이 이곳에 와서 복을 기원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은행나무 주변에 새로 거대한 주택을 건설하려 하자, 인근 주민들은 크게 반대했다. 무당은 “지신님이 복수할 것이다. 집안에 악운이 내리고 화마가 집을 삼킬 거다”라며 저주했다.

저주의 여파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26년 딜쿠샤에 낙뢰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는 상당히 큰 규모였기 때문에 경성 시내 소방서가 총동원됐다. 1926년 7월 27일 자 동아일보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7월 26일 오전 8시 40분 행촌동 1번지 미국인 사업가 테일러씨의 벽돌 이층집 굴뚝에 돌연히 벼락이 내렸다. 그로 말미암아 불이 일어나서 소관 서대문서와 시내 각 소방서의 총출동으로 폭우가 내리는 중에 진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곳은 지대가 높은 산언덕이어서 물을 마음대로 끌어댈 수 없었다.

불은 결국 그 집 건물 이층 전부를 태우고 아래층도 반이나 태운 후 겨우 진화됐다. 고용된 사람 1명이 감전돼 일시 혼도(정신이 어지러워 쓰러짐)했으나, 생명에는 별 관계가 없다고 한다. 소방부 김복일도 부상을 당했다 하며 그 집 위층에 산처럼 쌓아두었던 수백 년 된 귀중한 고물(옛날 물건)이 많이 소실됐다는데 손해는 약 1만원가량이라더라.”

대형화재로 집이 거의 전소됐고 테일러가 수집한 많은 골동품이 소실됐기에, 이들 부부는 허망해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딜쿠샤를 지었던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고 집을 보수하고 한국에서의 삶을 지속했다. 한국에서 광산업과 상업으로 많은 돈을 모았던 테일러 부부의 삶은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알버트는 AP통신 특별통신원으로 3·1운동 소식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계에 알렸기 때문에, 일제 입장에서는 거북한 존재였다.


대형화재 겪고도 한국에 남아

미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나면서 당시 서울에 있던 연합국 국적의 외국인들은 전쟁포로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됐다. 알버트 테일러는 이때 약 6개월간 형무소에 감금됐고, 메리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알버트 테일러의 투옥에 대한 기록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그가 6개월간 어떻게 지냈는지를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메리 테일러의 가택연금은 그녀의 자서전에 기록돼 있다. 메리 테일러는 그녀를 감시하는 일본 경찰들로 인해 식량 조달에 어려움이 있었다.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 식자재 구입을 위해 하인을 오랜 시간 밖으로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를 도운 것은 이웃 주민들이었다.

“때로는 누군가가 길게 엮은 달걀 한두 줄을 대문 안이나 창문턱에 놓고 간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는 키우지도 않는 암탉들이 어느 날 나타나 집 안에서 꼬꼬댁거리며 돌아다녔고, 어느 날에는 죽은 꿩도 던져져 있었으며, 한국 사람들이 매일 먹는 김치가 어디선가 나타난 날도 있었다. 자기가 이런 선물을 했다고 밝힌 사람은 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는 이웃에 사는 가난한 한국 사람들이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우리에게 보내준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들 부부는 딜쿠샤를 끝까지 지키려 했으나, 1942년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 추방됐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종전 후 알버트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했으나 이를 이루지 못한 채 캘리포니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한국에 돌아온 건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1948년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될 때였다. 주인이 떠난 딜쿠샤는 본래의 모습을 잃고 다세대주택으로 변형됐다. 한국전쟁 이후 법률적으로는 1959년 자유당 조경규 국회의원이 소유했으나 1963년 군사정권 때 압수돼 국가 소유로 전환됐다. 소유권만 국가로 넘어간 상태로 비어있는 건물에 1~2명이 임대차 계약을 하며 터전을 이어온 것이 수십 년이었다.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한국을 방문한 2005년에는 16가구(2016년 12가구, 2017년 3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문화재 등록 및 복원 과정에서 거주민 거처 마련 협의에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딜쿠샤의 소유권 양도 및 거주민 이주비용 문제 등을 둘러싼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간 갈등 조정 또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부는 원래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딜쿠샤를 개방하려 했지만, 이 같은 문제 탓에 이루지 못했다. 현재 서울시는 2020년까지 ‘알버트 테일러 박물관’으로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딜쿠샤는 한국 현대사의 풍파를 대변하듯 다양한 모습으로 한 세기를 풍미했다. 화재를 딛고 다시 새롭게 저택으로 탄생했고, 서울의 전형적인 다세대가구 주택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그 가치를 조망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이제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할 딜쿠샤는 또 다른 새로운 의미의 축적을 기다리고 있다.


▒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부원장, 공유도시랩 디렉터, 금융위원회 금융발전심의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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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1923년 서울 종로구 사직로2길 17(행촌동 1-88번지)에 준공된 서양식 저택.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을 뜻한다. 당시 경성(옛 서울)에서 다양한 사업을 한 미국인 알버트·메리 테일러 부부가 지었다. 남편인 알버트는 3·1운동을 해외에 알린 인물 중 하나다. 서울시는 이 저택을 2020년까지 ‘알버트 테일러 박물관’으로 재건축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