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개봉한 영화 ‘탑건’. 사진 IMDB
1986년 개봉한 영화 ‘탑건’. 사진 IMDB

전투기 조종사라고 해서 모두 공군은 아니다. 육군에도, 해군에도, 해병대에도 파일럿이 있다. 미국 해군은 조종사 가운데 소수 정예를 선발, 전문 교육 기관에서 따로 훈련시킨다. 영화 제목 ‘탑건’은 그 학교를 가리킨다.

매버릭은 본능적인 비행 감각과 타고난 재능을 갖춘 해군 파일럿이다. 그에게 하늘은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버지를 데려간 슬픔의 공간이자 아버지 대신 이루어야 할 꿈의 무대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그 자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대담한 기술로 임무를 수행해온 그는 부조종사이자 가장 친한 친구 구스와 함께 탑건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얻는다.

매버릭은 훈련 비행에 나서자마자 새로운 날개를 얻은 이카로스처럼 창공을 누빈다. 그는 규칙과 정도를 철저히 지키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아이스맨과 자존심을 걸고 최고의 자리를 다툰다. 파일럿의 첫 번째 임무는 적기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믿는 그는 편대를 이루어 작전을 수행하다가도 자리를 이탈해 공격에 나선다. 

적기와 맞선 조종사들은 공격수와 수비수처럼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실력을 과신해 대열을 빠져나가면 공격수는 전투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교관들은 매버릭이 뛰어난 파일럿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명령 불복종까지 허락할 수는 없었다. 규율이란 많은 선배의 경험과 희생을 통해 얻은 산물, 파일럿의 생명을 지켜줄 안전선이기 때문이다.

상관의 경고를 듣고서도 매버릭은 돌출 행동이 자신과 동료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결같이 매버릭을 지지해 주던 구스도 이번만큼은 상부의 눈 밖에 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탑건은 성공이 보장된 엘리트 코스다.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는 그는 무사히 과정을 마치고 졸업할 수 있길 바란다. 

구스와 약속했지만, 아이스맨을 이기고 싶은 매버릭은 또다시 모험에 뛰어든다. 천재들이란 곧잘 ‘이렇게 쉬운 걸 왜 못 하지?’ 하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게 비행 규칙이란 텅 빈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 이내로 달려야 한다고 제한하는 교통법규와 다르지 않다. 얼마든지 안전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비행하며 적을 격파할 수 있는데 왜 정해진 속도와 고도와 위치를 지켜야 하는가? 

나는 최고다, 나는 최고 파일럿이었던 아버지의 아들이고, 세상은 그런 나를 인정해야 한다! 아마도 매버릭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마음껏 추월하고 속도를 높이고 고도를 넘나들며 재주를 뽐낸다. 그러나 직접 모의 전투에 나선 탑건의 교장 바이퍼 중령은 끝내 매버릭의 자만심을 꺾어놓는다.

아이스맨도 “넌 적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믿을 수 없는 아군이란 멀리 있는 적보다 위험한 존재다. 자신은 최고도 아니고 동료의 신뢰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매버릭은 자존심이 상한다. 구스에게도 미안하다. 하지만 그는 “너를 믿는다”고 말할 뿐 비난하지 않는다. 매버릭은 처음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이대로 계속하면 아버지를 능가하는 훌륭한 조종사가 될 수 있을까.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훈련에서 그의 마음은 다시 조급해진다. 왜 저렇게 꾸물거릴까? 나라면 단번에 쏘아 맞힐 텐데. 그러면 아이스맨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 탑건 트로피를 거머쥘 수도 있다. 그는 빨리 공격하라고 아이스맨을 다그친다. 자신이 대신 공격하겠다며 밀어낸다. 그러다 엔진이 꺼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비상탈출 도중 구스가 사망한다. 

전투기 파일럿은 오랜 시간, 수많은 혈세를 투입해서 길러낸 인재들이다. 하지만 날개 없이 태어난 인간의 숙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 밀랍이 녹아 추락한 이카로스처럼, 그들은 아침에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가 두 발을 딛고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할 수도 있다. 

조사 위원회는 예측 불가능한 사고였다며 매버릭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동료와 상관은 슬픔을 극복하라며 그를 격려한다. 이제 그만 구스를 보내주라고, 최고가 되려면 멈추지 말고 계속 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매버릭은 구스가 아닌 다른 부조종사와 비행하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공격을 욕심내지 않았다면 사고는 없었으리라, 조종석에 앉을 때마다 자책과 상실감이 커질 뿐이다. 

“한계를 극복해야 해. 그게 우리 임무지. 자네가 선택하게.” 매버릭의 아버지와 베트남 전쟁을 함께했던 바이퍼 중령이 그의 등을 다독여준다. 조종석을 떠날 것인가, 다시 용기를 내어 위험과 슬픔을 감당하며 하늘을 지킬 것인가? 갈림길에 선 매버릭은 친구의 못 다한 삶까지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의 비행은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곡예일 필요가 없다. 꼭 일등이 아니어도 되고 누구보다 먼저 출격하지 않아도 된다. 최고란 독불장군이 돼 혼자 빛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을 믿고, 동료를 믿고, 그들이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이스맨은 매버릭의 도전 정신과 직관을 인정하고, 매버릭은 아이스맨의 차가운 이성과 성실함을 존중한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최고가 된다. 

‘탑건’의 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1986년에 토니 스콧 감독의 본편이 발표된 지 36년이 지난 올여름,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만든 ‘탑건: 매버릭’이 개봉됐다. 신세대 반항아였던 매버릭이 신세대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는 탑건의 교관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십대 초반의 톰 크루즈가 연기했던 매버릭처럼 레이밴 선글라스와 항공 점퍼를 입고 청춘을 보낸 부모 세대와 그들의 자녀 세대를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다. 

세상은 각박하고 사악하며 고통 가득한 곳이라고 말하는 영화도 필요하다. 그러나 관객이 반갑게 극장으로 달려가 보고 싶은 건 꿈과 사랑과 희망, 세상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자긍심, 유치해 보일지언정 마지막엔 모두가 손뼉치고 연인과 키스하는 해피엔딩이 아닐까. 객석에서 일어설 때 가슴 가득 차오르는 즐거움을 모처럼 움켜쥐어도 좋을 것 같다. 본편까지 마스터하면 감동은 두 배. 젊은 시절 톰 크루즈의 싱그러움은 보너스.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