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이 현충사에 방문한 기념으로 찍은 사진. 앞줄 맨 왼쪽이 정세권,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극로, 같은 줄 네 번째가 안재홍이다. 사진 한글학회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이 현충사에 방문한 기념으로 찍은 사진. 앞줄 맨 왼쪽이 정세권,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극로, 같은 줄 네 번째가 안재홍이다. 사진 한글학회

“갖은 간악한 수단을 두루 써오던 일본인들이 이 기회(종로개수사업으로 조선인 토지를 빼앗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략) 조선인을 감언이설로 충동시켜 그 땅을 전부 자기의 수중에 넣고자 암중비약을 한다 하여, 아직까지 조선인이 위태한 발을 붙이고 있는 종로 거리가 속절없이 저들의 소유가 되려 한다.”

1925년 6월 18일 자 ‘종로도로개수와 일본인의 북진’이란 제목의 조선일보 기사 일부다. 1920년대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북진(北進·북촌 진출)으로 충격을 받고 공포에 휩싸였다. 기사는 조선인의 주거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할 수 있다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당시 조선일보는 북촌을 지키기 위해 조선인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종로 거주민 길진옥씨의 말을 빌어 소개했다. “터를 안 팔려고 기를 써가며 은행으로부터 비싼 이자를 주고 돈을 얻어다가 이층집을 짓는 중인 즉, 앞으로 장사가 잘되면 몰라도, 만일 그렇지 않다면 결국은 은행 물건이 되고 말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 아닙니까?”

일본인들이 온갖 수를 동원해서 북진을 하고 있는데, 경제력이 부족한 조선인들은 은행 빚을 지면서까지 본인들의 주거지를 지키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당시 조선인들의 북촌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북촌의 주택들이 일본인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일제의 북진이 가시화되면서 북촌에서 빈집이 빠르게 감소했다. 1927년엔 경성에 새로 유입된 일본인 중 70%가 북촌에 정착하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터전이었던 북촌에서 쫓겨났고 주택 부족 문제까지 겹쳤다. 조선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력 또는 조직이 절실히 필요했다. 누군가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을 대규모로 지어줘야 주거지를 지킬 수 었있다. 한옥을 건설해 일반인들에게 매도 혹은 임대하는 기업(디벨로퍼)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암울한 시대였기는 하지만, 당시 경성은 소비도시에서 생산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지방 인구가 경성으로 몰려드는 것은 경성 주택 수요 차원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신호였다. 또 대단위 토지가 매물로 나온 것 역시 디벨로퍼에게 희소식이었다. 디벨로퍼가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주택 수요층을 위한 새로운 조직이 등장했다. 바로 조선인 출신 신흥 자본가 계층, 근대적 디벨로퍼들이다. 서류상 현재 존재가 확인된 근대적 디벨로퍼는 정세권의 건양사, 김동수의 공영사, 마종유의 마공무소, 오영섭의 오공무소, 이민구의 조선공영주식회사, 김종량, 정희찬 등이 있다. 1940년대에 활동한 장지환의 신주택사, 박흥식 소유의 경인기업주식회사, 이승병과 조흥호의 신흥건축사도 있다. 다만 활동이 어느 정도 알려지고 있는 사람은 정세권과 김종량, 이민구 등에 그친다.

일제시대에 조선의 디벨로퍼가 사업을 하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일제는 구조적으로 이들이 관급공사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 은행 대출을 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부동산을 개발하려면 크게 토지매입비와 건설비가 필요하다. 디벨로퍼는 자기자본(equity)과 은행 대출금(debt)으로 비용을 댄다. 그런데 당시 조선식 주택(한옥)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문화주택에 비해 담보평가액이 20~30% 낮았다. 따라서 동일한 규모의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 문화주택보다 조선식 주택의 담보 가치가 낮아 은행에서 원하는 만큼 대출을 받기 어려웠다. 그래서 근대적 조선인 디벨로퍼들은 자기자본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식 주택이나 문화주택 건설업자에 비해 불리한 금융조건으로 사업을 해야 했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각종 제약과 난관을 겪었지만, 조선인 근대적 디벨로퍼들은 대규모 부동산 개발과 운영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단한 부(富)를 거머쥐었다. 일부는 민족적 소명을 갖고 사업에 임했다. 건양사 정세권의 둘째 딸인 고(故) 정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아버지는 항상 사람 수가 힘이라고 말씀하셨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했다.

익선동 골목 안에 자리잡은 한 카페. 기와지붕 처마 아래에서 느껴지는 고즈넉한 봄바람은 살갑다. 지금은 카페로 쓰이는 이 한옥은 1930년대 정세권이 지어 분양했다. 사진 조선일보 DB
익선동 골목 안에 자리잡은 한 카페. 기와지붕 처마 아래에서 느껴지는 고즈넉한 봄바람은 살갑다. 지금은 카페로 쓰이는 이 한옥은 1930년대 정세권이 지어 분양했다. 사진 조선일보 DB


디벨로퍼, 집장사로 폄하해선 안 돼

북촌의 위기는 역으로 한옥집단지구를 건설하는 근대적 조선인 디벨로퍼를 탄생시켰다. 일종의 신흥 자본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북촌의 조선인 거주지가 지켜질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한옥집단지구는 1920~40년대 ‘집장사’가 지었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들 디벨로퍼들을 더 이상 집장사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부를 일군 디벨로퍼 중 일부는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북촌과 익선동을 개발한 기농 정세권 선생은 한옥집단지구 개발로 번 막대한 부를 민족운동(신간회·조선물산장려회·조선어학회 등) 후원에 사용했다. 조선일보 사장 민세 안재홍, 조선어학회를 이끈 고루 이극로와 함께 1920년대 중반 이후 경성에서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일제는 1940년대에 그의 부를 강탈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