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성실한 관심이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성실한 관심이다.

아이 둘을 각각 학교에 데려다주는 아침 길은 무척이나 막힌다. 운전자도 행인도, 다들 서두르는 바람에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나 역시 서두르는 날이 대부분이라 위험은 배가 된다. LA에서의 운전은 서울의 운전보다 더 까다롭고 위험하다. 고속도로는 어마어마하게 빠르고 시내 운전은 난폭하다. 서울처럼 신호 체계가 잘돼 있지 않고 수시로 비보호 좌회전을 해야 한다. 반대편 비보호 좌회전 운전자의 유무도 점검해야 한다. 곳곳의 스톱 사인들도 제각각의 규칙을 지니고 있어 확인 않고 가다 다른 부주의한 운전자를 만나면 어김없이 사고의 위험을 떠안는다. 아무리 빠르게 해도 아침에 오가는 시간을 다 합치면 한 시간이 조금 넘는다. 오후에 아이들을 데려올 때도 그리 줄어들지는 않는다. 같은 길로 다니는 걸 싫어해서 이리저리 길을 바꿔 다니긴 하지만 매한가지다.

지루함을 이기는 방법은 끊임없는 발견 말고는 없다. 날씨의 변화, 달라지는 하늘 색깔, 시시각각 새롭게 떠오르는 건물 빛,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간판들 혹은 지나가는 운전자나 행인의 움직임, 얼굴 표정을 클릭하듯 주목한다. 바라보되 판단은 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중인데, 사진을 찍듯 보고 관찰하고 빠르게 넘어가는 식이다. 머릿속은 비우려고 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루한 운전의 나만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

요새는 되도록이면 아침에 요가 수업을 듣는다. 수업을 들으려면 아침 운전을 제시간에 마쳐야 한다. 수업 시작 시간을 맞출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조금만 길이 더 막혀도 놓치기 일쑤다. 오늘은 요가 수업에 약간 늦게 들어갔지만, 열심히 하고 왔다. 수업을 마치고 요가원의 바깥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 가뿐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냄새가 풍기는 뒷골목을 지나 찬란한 햇빛 아래 연둣빛으로 부서지는 나뭇잎 가득한 길로 들어선다. 나의 빨간 차가 저 멀리 보인다. 내가 근처에 가면 차는 알아서 귀를 쫑긋하듯 차 미러를 펼치고 운전석 문을 연다.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 같아 사랑스럽다. 나를 알아본다기보다는, 내가 지닌 제 열쇠를 감각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보고 반기는 것 또한 각각의 감각 속 열쇠들을 느끼고 인지하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문득, 내 삶 속 흘러가는 인연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서로에게 열쇠를 쥐어주지 않더라도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었던가. 어쨌든 예전과 달리 한 가지는 알게 됐다. 열쇠가 전부는 아니다. 긴요하긴 하지만, 그 모든 조직체가 움직이고 반응하는 데에는 더 많은 요소와 질서가 존재한다.

아무리 열쇠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온전히 도착지에 이르지 못한다. 차에 오르면 그 차에 알맞은 운전법을 알아야 한다. 길을 찾을 줄도 알아야 하고 그 길을 지배하는 운전 규칙은 물론이고 다가오는 차들의 흐름 또한 주의해야 한다. 끊임없이 발견하고 배우고 익숙해지되 당연해지지 않아야만 유지된다. 노력 없이 이뤄지는 건 없다. 있는 모습 그대로, 거기 그렇게, 거저 버티는 건 어디에도 없다. 열쇠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랜 시간과 함께 애정과 신뢰로 무르익은 삶의 동지이자 연인으로 살아가는 부부들을 가끔 마주친다. 운 좋게도 그들 중 두 커플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최근에 주어졌다. 한 커플과는 몇 차례 짧은 여행을 다닐 기회가 있었고, 다른 한 부부는 우리 집에서 2주가량 머물렀다. 두 부부 모두 직업 특성상 함께 지내는 시간이 하루 24시간에 다다를 정도로 밀착된 관계였는데, 다툼 없이 다정히 그리고 성실하게 사랑하고 일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이 특별한 이유를 들라면 꾸준한 존중과 일상 속 노력을 꼽겠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일단은 인정한다. 상대의 의견이나 감정을 수용하고 확인한 뒤 공감을 보내거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면 공격적이지 않게 묻는다. 다른 의견이나 감상이 있다면 그 뒤에 덧붙인다.

상대 또한 같은 과정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들어보면 별거 아닌, 당연한 대화의 과정인 듯 보이지만, 이게 하루에도 수없이 벌어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당황할 때 피곤할 때 짜증 날 때 바쁠 때 등등 나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에서도 상대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건 오래도록 쌓인 신뢰와 행동, 습관 없이는 어렵다. 긴 시간 반복해 온 그들만의 의식 같아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듯하지만,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행착오 또한 있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성실한 관심이 사랑

이와 같은 꾸준한 존중은 상대에 대한 인정과 나아가 그 존재에 대한 성실한 관심을 바탕으로 한다. 상대가 무얼 원하고 바라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고서는 마음 깊은 존중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관심과 존중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일까. 운명의 상대를 만나서, 서로의 존재에 다다르는 열쇠를 쥔 인연이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물론, 특별한 상대는 있다. 인생 속 단 한 사람처럼 다가오는 사람을 우리는 아주 가끔 만난다. 그렇지만 축복받은 만남만으로 관계는 완성되지 않는다.

삶 속에 굳건히 자리 잡은, 지속적이면서 두 존재가 같이 성숙할 수 있는 관계를 원한다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 노력은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운전이 차의 동작에 대한 이해와 훈련, 길을 알고 주변 사정을 파악하며 주의와 관심으로 노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과 비슷하다.

객기와 무모함으로 점철된 운전이 종종 사고로 마무리되듯 관계 또한 그렇다. 물론, 아무리 노력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사고는 일어난다. 그때는 사고에 맞게 상황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다친 몸과 마음을 보살피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

나와 당신을 하나로 만드는 관계, 단 하나의 열쇠로 열고 들어설 수 있는 당신과 나의 세계란 지속 불가능한 신기루와 같다. 지난 시절 나의 사랑은 열쇠를 거머쥐고 있다는 벅참만으로 관계의 대부분을 완성한 듯 오만하게 달려가는 식이었다. 열쇠로 문을 열었음에도 꿈쩍 않는 상대방의 문을 두드리고 무작정 부딪쳐 보기도 했다. 원망하며 돌아선 적도 있었다. 문이 열렸다고 해도 꿈에 그리던 통합, 잃어버린 반쪽과의 재결합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랑은 상대의 질서를 인정하고 적어도 상상하고 헤아리려는 노력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 것이다. 아이를 돌보고 함께 성장하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무엇 하나 당연한 건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연인 간의 사랑에 관해서는 너무 쉽게 처음부터 완성품을 얻고 싶어 한다. 사랑이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창조적인 활동이라면 그건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게으른 자에게는 태어나지 않는다. 상상력이 부족한 자에게도.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