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피아노 제작의 중심지 독일 함부르크.
유럽 피아노 제작의 중심지 독일 함부르크.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장인들의 손끝에서는 피아노 부품이 섬세하게 다듬어지고 있다. 이런 풍경을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가면 양옆으로 오와 열을 맞춘 수십 대의 그랜드피아노가 도열해 있다. 마치 왕을 맞이하는 수십 명의 신하 같다. 직원 한 명이 커피를 가져다주며 살짝 귀띔해준다. “모두 당신을 위해 준비한 피아노예요.”

7년 전 함부르크에 있는 ‘스타인웨이앤드선스(이하 스타인웨이)’ 피아노 본사 공장을 처음 방문했던 때의 기억이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가 만들어지는 곳에서 훌륭한 악기를 수없이 많이 만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잠시 천국에 다녀왔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다.

그 후 함부르크에 거주하게 되면서 종종 이곳을 방문했다. 여러 공연장이나 단체에서 피아노를 선택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개인 피아노를 고르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악기를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이 기분 좋은 일은 함부르크에 사는 피아니스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다.

사실 여러 악기를 쳐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수십 대가 넘는 피아노 중 단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피아노에 앉아 같은 곡을 같은 감성으로 쳐도 울리는 소리,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같은 공정을 거친 같은 규격의 악기라고 해도 말이다. 악기를 고르는 것이야말로 평생을 함께할 연인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자신만의 피아노를 만나러 부푼 마음을 갖고 이 공장을 찾는 모든 이가 가지는 같은 마음일 것이다.

스타인웨이는 독일 출신 미국 이민자 하인리히 스타인웨이가 1853년 뉴욕에서 창립한 피아노 브랜드다. 이후 회사는 유럽 시장을 공략, 현지화를 목표로 1880년 독일 함부르크에 제2 공장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대륙마다 다른 니즈를 감안해 다른 스타일의 악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북미에서는 뉴욕 공장에서 제작한 피아노를, 유럽에서는 주로 함부르크 공장에서 만든 피아노를 선호하게 됐다. 그 결과 스타인웨이앤드선스라는 한 지붕 아래 대륙에 따라 사업 방향도 다르게 전개됐다.

한 대를 생산하는 데 1년 넘는 공정을 거친 덕분에 최상의 품질을 실현할 수 있다. 대당 가격이 거뜬히 1억원을 넘길 정도로 초고가 피아노다.

스타인웨이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음악인의 사랑을 받았다. 19세기 후반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가 대표적이다. 리스트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피아노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바그너도 새로 지은 자신의 콘서트홀에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들여놓았다.

스타인웨이는 지금도 수많은 음악가, 애호가들에게 ‘꿈의 피아노’로 불린다. 실제로 세계 공연장 및 단체가 보유한 피아노의 90% 이상이 스타인웨이의 콘서트 그랜드피아노로, 이 피아노가 공연계에서 표준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스타인웨이앤드선스의 그랜드피아노.
스타인웨이앤드선스의 그랜드피아노.

100년 넘은 스타인웨이 재탄생 공방 화제

최근 함부르크에 생긴 이색적인 피아노 공방도 현지에서 화제다. ‘클랑마누팍투어(Klangmanufaktur)’라는 이름의 이 공방은 다소 음침한 회색빛 공업 지대에 자리 잡고 있지만, 공방 안 풍경은 별천지다. 내부 벽면에는 다양한 색을 담은 미술 작품이 걸려 있고,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피아노가 조명 빛에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마치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온 듯하다.

이곳은 함부르크 스타인웨이 공장에서 수십 년간 일했던 명장 몇몇이 자신들만의 소리 예술 철학을 극한으로 추구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제작된 스타인웨이 피아노 중 자신들의 소리 예술을 구현할 잠재력을 가진 악기를 들여온다. 그리고 모든 부품을 하나하나 분리,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쳐 악기를 또 다른 생명체로 탄생케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올리버 그레니우스 공방 대표가 피아노를 소개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아직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악기는 제작자의 분신과도 같다. 그래서 악기 소리엔 제작자의 감정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제작자는 악기에 즐겁고 아름다운 감정만을 불어넣지는 않는다. 음악은 인간의 희로애락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기를 제작할 때 삶의 고통, 환희, 즐거움 등 모든 감정을 불어넣으려고 한다.”

피아노 악기 제작 산업계에서 함부르크는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만의 악기를 제작하기 위해 세계에서 몰려온 피아노 제작자나 기술자 등이 많다. 피아니스트로서 그들과 교감하는 것도 큰 배움인지라 이 도시에서 피아노 제작 전통을 알게 된 것은 크게 감사할 일이다.

앞서 말한 두 공간 모두 일반인도 방문할 수 있다. 혹시 독일 함부르크에 들를 계획이 있다면, 이 두 곳을 방문해보길 권한다. 마음껏 악기를 연주해볼 수도 있으니 올리버 그레니우스의 말처럼 인생의 희로애락을 피아노 소리로 음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을 영상

피아노 마니아

피아노 제작자, 조율사, 연주자를 주제로 2011년 상연 돼 유럽에서 큰 화제를 모은 영상이다. 프랑스 출신 피아니스트인 피에르 로랑 에마르가 자신의 콘서트에서 쓰일 그랜드 피아노 소리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스타인웨이 수석 조율사인 슈테판 크뉘퍼가 각 곡과 연주자, 홀 울림에 적합한 소리를 찾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피아노 소리 예술은 연주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악기, 연주자, 콘서트 조율사와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종합 예술이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흥미로운 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