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프성. 핀란드 남동부 도시 사본린나에서 열리는 오페라 페스티벌 공연장으로 쓰인다. 사진 한정호
올라프성. 핀란드 남동부 도시 사본린나에서 열리는 오페라 페스티벌 공연장으로 쓰인다. 사진 한정호

2019년 여름, 유럽은 사상 최악의 폭염을 겪고 있다. 7월 말 영국 케임브리지는 38도, 프랑스 파리는 42도를 넘었다.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베네룩스의 주요 지역도 같은 기간 40도를 기록했다. 폭염이 여름철 유럽의 일상이 되면서 클래식 페스티벌의 행정 감독들은 기후 변화에 따른 관객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스위스 루체른처럼 알프스를 낀 명문 페스티벌도 7월 최고기온이 30도에 근접한 올해, 관광객뿐 아니라 연주자들의 스트레스가 극심해지는 상황을 경계한다.

역으로 폭염을 기회로 삼는 곳도 있다. 7·8월에도 낮 최고기온이 20도 초반을 유지하는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발트해(러시아 서쪽 해안에 있는 바다) 지역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이 기후 변화 덕에 주목받고 있다. 여름 클래식 페스티벌은 관광·피서와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곳이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는 아이슬란드다. 7·8월 최고기온이 15도에 머무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는 2011년 완공한 콘서트홀 겸 컨벤션센터 하르파(Harpa)를 거점으로 색다른 기후 마케팅에 나섰다. 6월 레이캬비크 백야 축제, 8월 하르파 국제 음악 아카데미, 9월 레이캬비크 재즈 페스티벌을 하르파에서 페스티벌 형태로 개최하면서 폭염에 질린 유럽 관광객을 유인한다. 이미 록 음악 축제에 여름철 아웃도어 체험을 접목한 시크릿 솔루티스, 브레이드슬란 페스티벌로 성공을 거둔 노하우를 클래식으로 확장했다. 특히 ‘아이슬란드의 글렌 굴드(캐나다 출신의 명피아니스트)’로 불리며 백야 축제 감독을 맡은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은 국가의 청정 이미지를 클래식으로 넓히는 첨병이다. 8월 최고기온이 20도를 넘지 않는 핀란드 남동부 도시 사본린나에서 열리는 오페라 페스티벌도 기후 마케팅에 나섰다. 사본린나 페스티벌은 피서지를 콘셉트로 연평균 6만 명의 관객 유치를 꾀하고 있다. 노르웨이 남부 항구 도시 스타방에르 실내악 축제, 스웨덴 스톡홀름에 인접한 궁정극장 드로트닝홀름스의 여름 오페라 공연도 8월 최고기온 20도를 넘지 않는 도시에서 클래식을 즐기는 관광 콘셉트가 접목됐다.


지휘자 파보 예르비. 고국 에스토니아에서 열리는 오페라 페스티벌을 책임진다. 사진 한정호
지휘자 파보 예르비. 고국 에스토니아에서 열리는 오페라 페스티벌을 책임진다. 사진 한정호

발트해 3국도 인기

발트해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역시 여름 축제의 장점으로 피서를 내세운다. 자주 내한 공연을 해 한국 팬과 익숙한 지휘자 파보 예르비는 고국 에스토니아의 연안 도시 패르누에서 아버지 네메, 동생 크리스티안과 지휘 아카데미를 열고 있다. 관객이 패르누 페스티벌을 즐기다가 근처 해변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식이다.

라트비아의 해변 도시 유르말라는 올해부터 ‘리가·유르말라 음악 축제’를 시작했다.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을 만든 스웨덴 출신 사업가이자 음악 기획자인 마틴 엥스트롬이 라트비아 대기업의 후원을 유도해 만든 여름 축제다. 라트비아 출신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와 안드리스 넬슨스,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참가하는 축제를 만들어보자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얀손스가 이끄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비롯해 이스라엘 필하모닉,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8월 기온이 20도 초반인 쾌적한 라트비아를 방문하고,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8월 30일 런던 심포니와 유르말라를 찾는다.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에선 폭염을 이용한 피서지 마케팅을 넘어, 기후 변화의 흐름 속에서 클래식의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음악과 문화, 자연은 삼위일체’라는 환경음악학(ecomusicology)의 관점에서 환경 관련 주제를 반영한 작품과 공연이 등장해, 관객의 행동 변화를 촉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스웨덴 노를란드 오페라는 관객이 버린 페트(PET)병을 수집해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의 무대 의자와 세트로 활용했다. 공연을 통해 관객이 자발적으로 페트병을 깨끗하게 처리하는 습관을 유도한 것이다.

스웨덴 헬싱보리 심포니의 대처는 단호하다. 헬싱보리 심포니는 2020-2021시즌부터 스웨덴 헬싱보리에서 열리는 공연에 참석하기 위해 스웨덴 이외 지역에서 오는 지휘자와 연주자에게 항공편 제공을 중단한다. 항공기 대신 시간이 걸려도 육로나 해로로 이동하는 데 동의하는 연주자들로 시즌을 채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헬싱보리 심포니의 행정감독 프레데릭 웨스털링이 항공기가 내뿜는 대기 오염 수준이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한 데 따른 조치다. 스웨덴 말뫼 심포니도 헬싱보리의 조치를 환영하고 있으며, 메조소프라노 말레나 에른만도 비행기를 이용한 이동을 중단했다.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영국 예술위원회의 지원으로 지속 가능 프로그램 ‘촉진자(Accelerator)’를 시행하면서 해외 투어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 폐해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스웨덴 언론은 영국 로열 필하모닉이 일본 도쿄 산토리홀에서 열린 공연을 위해 325t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켰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핀란드 라티 심포니는 2015년부터 탄소 배출 최소화를 사회적 책임으로 여긴다. 스웨덴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유럽 대륙 투어를 떠날 때, 비행기 대신 기차로만 이동했고 연주 여행을 ‘그린 투어’로 명명했다. 악단 차원에선 작지만 점진적인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후 변화 대응에 대한 논의가 클래식계 전반으로 확산하려면 유명 음악가의 지지가 절실하다. 그러나 아직 거장급 노장(老將) 아티스트의 참여는 미미하다. 북유럽에 사는 젊은 연주가들이 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스웨덴 예테보리에 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는 소셜미디어에 기후 변화 문제를 포스팅하고, 핀란드의 청년 바이올리니스트 페카 쿠시스토가 그린피스 활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정도다. 국제기구 차원에선 유엔 환경회의(UN Climate Conference)가 기획한 베토벤 ‘전원’ 프로젝트가 눈에 띈다. 유명 음악가들이 베토벤의 교향곡 ‘전원’을 연주하며 전 지구적 차원에서 기후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행사로, 2020년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기획했다.